[이재준 문화칼럼] 무술년, 화마 비극 되풀이 말자
[이재준 문화칼럼] 무술년, 화마 비극 되풀이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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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대에도 화재는 나라의 큰 고통이었다. 대부분 목조건축물을 지었기 때문에 민초들은 불이나면 모든 가산이 잿더미가 되어 유랑이나 걸식을 해야 했다. 신라 미추왕 원년 서라벌에 화재가 발생, 민가 백여채가 불탔다. 진평왕 18년 왕도에 큰 화재가 발생, 왕이 현장에 나가 이재민을 위로했다는 기사가 있다.  

기록을 보면 고려, 조선 시대에도 화재가 많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 현종 12년에는 개경에 화재가 발생, 2천여호가 전소되는 참사가 있었다. 충렬왕 2년에도 개경에서 불이 나 1천여호의 민가가 타 수천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임금은 자신의 부덕을 되돌아보고 백성들은 목숨을 끊거나 사랑하는 자식마저 팔았다.

조선 영조~순조 시기에는 궁궐 화재 건수가 많았다. 영조 6년에는 창경궁에 화재로 도자기 창고인 사옹원이 불타기도 했다. 순조 때는 특별히 창덕궁 경희궁 경복궁 등 궁궐에 대소 화재가 발생했다. 또 순조 7년에는 평안도 자모성 화약고가 불타 화약 3만 8천근, 군막 83매, 탄환 40만 9천발이 소실됐으며 범인을 체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부터 궁전을 신축하면서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은 매우 정교했다. 뜰에는 화기를 막는다는 해태상을 조각해 장엄하게 세웠다. 건축물의 위에는 수기(水氣)를 품고 있다는 용마루를 만들어 놓았다. 용 형상을 만들지 못한 민가에서는 대신 상량문에 먹 글씨로 용(龍)자나 구(龜)자를 썼다. 

고구려 왕궁이나 사찰을 지을 때 사용했던 막새(瓦當)를 보면 속칭 귀면(鬼面)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큰 코에 부릅뜬 눈, 머리칼은 화가 난 듯 뒤로 넘겨진 강인한 상이다. 역사고고학계는 일제시기부터 귀면을 ‘도깨비’라고 지칭해 왔다. 그런데 이대박물관장을 역임한 원로 미술사학자 강우방 박사는 이를 용면(龍面)이라고 해석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용면와당을 매우 사랑했다. 국내성에서 출토된 막새의 초기 용면은 눈을 부릅뜬 용감하고 기상이 넘치는 사람의 얼굴이다. 이 모양이 점점 무서운 용의 얼굴로 변해 진 것이다. 

최근 들어 중국 역사고고학계는 요녕성 우하량 지역에서 발굴된 홍산문화를 중국의 역사의 뿌리로 인정해 가고 있다. 그런데 중국 설화에 등장하는 용감한 전사 ‘치우’는 홍산인의 후예로 각인된 것이다. 치우는 중국황제와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면서 무서운 존재로 그려졌다. 그런데 설화속의 치우는 구름과 바람을 끌고 다니는 비(雨)의 화신이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홍산유적에서 출토된 수장급의 치레걸이인 구운형옥패(勾云型玉佩, 일명 齒型獸面玉佩)를 ‘치우롱(虬龙)’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치우’와 ‘용’이 합쳐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치우는 홍산 시기부터 계승돼 온 고구려인들의 천신(天神) 신앙이었다. 이들이 비를 일으키는 신, 치우의 형상을 막새로 만들어 화재를 막으려 했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제천은 고구려 시대 나토군(奈吐郡)이었다. 시내에 있는 장락사 절터에서는 고구려 와당도 찾아졌다. 당초 비를 몰고 오는 용면와당도 올렸을 게다. 용신이 지하에서 잠든 때문인가. 제천 도심의 스포츠센터 화재로 많은 시민들이 참변을 당했다. 너무 황당하고 개탄스럽다. 비극을 당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안타깝고 눈물겨운 사연이 많다. 

이번 비극은 한국 사회 모든 도시 건축물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다. 인화성이 높은 건축자재에 몇 번을 데고도 반성 못하는 한국이다. 소방도로에 불법주차를 해도 지방자치단체는 벌금딱지 한 장 떼고 방치한다. 불이 나도 소방차가 마음대로 진입할 수 없는 상황이 어디 제천시뿐이겠는가. 

황금 개띠해의 막이 올랐다. 개는 충직한 동물을 상징한다. 올 한해 국민들이 마음 놓고 생업에 임할 수 있도록 공직자들의 사명감 있는 분발을 촉구해 본다. 인재로 인한 엄청난 비극을 다시 반복하는 일만은 없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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