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강태공은 주(周)나라 때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즐기며 살았던 선비였다. 그가 집안일을 돌보지 않자 생활고에 찌든 아내는 집을 나갔다. 가장이 낚시에 빠지다 보면 아무래도 아내들은 외롭고 불만에 빠지기 마련이다. 나중에 강태공이 문왕에게 발탁돼 벼슬길에 나가자 아내가 돌아왔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 부부에게 있어 낚시는 금슬을 깨는 불행의 단초가 된 셈이다.   

지금도 중국인들의 낚시 열풍은 대단하며 현대판 강태공들이 8천만명이나 된다. 한국도 작은 땅덩어리에도 불구 현재 7백만명의 마니아가 있다. 낚시는 이제 취미수준을 넘어 레저나 스포츠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과거 기록을 보면 조선도 낚시 천국 같은 인상이 든다. 근엄하기만 했던 유학자 율곡(栗谷) 도 낚시를 사랑했다. 강릉 경호정에 나가 밤 낚시하는 즐거움을 시로 표현한 작품이 전한다.

- 이슬내린 섬돌에 벌레소리 가냘프고/ 바람 부는 난간에는 달그림자 많아라/ 맑은 밤이라 꿈 이루기 어려워/ 물결 이는 경호에 낚시 갔다 올까나(露砌蟲聲細 風欞月影多 難憑淸夜夢 歸釣鏡湖波) - 

명장 이순신 장군도 평소 낚시를 즐겼다. 바닷가를 임지로 삼은 탓에 바다낚시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인가. 기록을 보면 전남 보성에서 신혼을 보내면서도 낚시 삼매경에 빠졌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충무공은 전쟁 중에 한 지인에게 글을 보냈는데 난이 끝나면 평범한 촌부로 돌아가 낚시를 하며 살고 싶은 소회를 적어 보냈다. 애석하게도 장군은 이런 소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흉탄에 쓰러졌다. 

- (전략)…일본수군을 멸망시키고 나라를 중흥시켜 우리나라의 임금과 백성이 성세를 누리게 되면 저와 같은 무용지물은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옛날 같이 낚시질이나 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을 이루는 것입니다…(하략) - 

조선 성종 때 학자였던 규암(圭菴) 송인수는 권신들과 싸우다 전라도 화순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유지라는 어린 기생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규암은 창랑으로 나가 낚시를 즐기며 여인과 사랑을 속삭였는데 멋들어진 시를 남겼다.  

-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 낙조 청강에 빗소리 더욱 좋다/ 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 들고 행화촌(杏花村)으로 가리라 -

송인수는 어린 기생과 사랑하면서도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기생 유지는 이런 규암을 평생 사모했는데 그가 임종할 때는 가족들의 양해를 얻어 마지막을 지켰다는 일화가 전한다.   

우리 조상들이 낚시를 즐겨한 것은 조선 시대 회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어(釣魚) 그림이 많지만, 서울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조선 숙종 때 화원 이명욱(李明郁)의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가 백미다. 낚시를 끝내고 귀가하는 낚시꾼과 나무꾼이 웃으며 담소하는 모습에서 세속을 잊은 즐거움을 엿볼 수 있다. 

해양수산부 통계자료를 보면 현재 한국의 낚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낚싯배 수도 2015년 4289척에서 지난해 4500척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해양수산부와 어민들은 어족자원이 씨가 마른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이렇게 많다보니 어선 전복사고를 비롯한 각종사고가 빈번하다.  

유럽의 선진국들도 낚시 인구증가로 인한 어족자원 보호와 환경문제를 호소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낚시를 허가제로 하는 등 규제가 엄격하다. 영국정부도 해외 영토 주변에 있는 바다에서 상업적으로 낚시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백악관은 대서양 5000km² 지역과 동북쪽 협곡, 해양 국립 기념물에서 낚시를 금지시키고 있다. 

이번 영흥도 앞바다 낚싯배 전복사고의 비극을 거울삼아 총체적 점검을 서두를 때다. 7백만 강태공 시대, 국가는 낚시로 인해 가장을 잃는 가정의 비극만큼은 더 만들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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