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판소리에 입문하는 이들이 제일 먼저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사철가다. 서양 고전음악인 비발디의 사계보다 국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겐 더 멋지고 흥겨운 소리다. 변화하는 사계와 인생의 황혼을 아쉬워하는 가사에는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아픔이 녹아있다. 애초 신라인들이 잘 불렀던 향가도 이런 음률을 지닌 가락이 아니었을까.

- (전략)…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세계가 되고 보면 월백 설백 천지백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하략)

-중종 때 옥봉(玉峯) 백광훈은 풍류남아로 시를 잘 지었다. 그가 어느 해 전라도에 가서 당대 유명한 기생 호남월(湖南月)을 만났다. 그런데 그토록 아름다웠던 호남월은 늙어지자 모습이 초췌했다. 옥봉은 그녀와 술잔을 나누며 춤을 보고 싶어 했다. 기생은 그 앞에서 춤을 추었다. 시인은 그 모습을 보고 시 한수를 짓는다. 

- 한 곡조 맑은 노래 장안에 소문이 났으니/ 왕손의 누각에서 비단치마도 입었었지/ 화려함이 유수(流水) 따라 다 흩어지니/ 가을바람 향해 춤을 추자 눈물이 구름을 채우네… -

옥봉의 시구처럼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인가. 정유년 새 봄을 맞이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1년이 금방 흘러갔다. 각 단체, 모임, 회사에서는 이미 망년회 바람이 불고 있다. 

‘망년회’라는 명칭이 일본에서 전래됐다고 하지만 망년풍속은 중국과 한국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신기록인 연행록(燕行錄)을 보면 중국에서도 매년 마지막 날 궁중에서 ‘연종연(年終宴)’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궁궐에서도 내시별감을 사찰 등에 보내 나라와 왕실의 복을 빌었으며 이를 ‘연종환원(年終還願)’이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망년이나 연종이나 다 같은 말이다.

그리고 그믐날은 온 장안이 나례(儺禮)행사로 들썩였는데 이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내려 온 전통적인 가면무도회였다. 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만들어 쓰고 나와 주문(呪文)을 외면서 귀신을 쫓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례의 ‘우희(優戱)’ 공연이었다. 요즈음 마당극 같은 것이었는데 배우들이 연희를 통해 해학적인 문답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입에서는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물론 시폐나 악습까지 들추었다고 한다. 임금은 궁궐 안에서 나오지 못하여 나라사정에 밝지 못했다. 그래서 배우들이 주고받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에는 ‘이것이 바로 나례를 만든 까닭이다’라고 그 의미를 적고 있다.

연말 망년회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망년주’. 이 말은 이미 중국 북송시인 소식(蘇軾)의 시에도 등장한다. 송년을 맞아 나쁜 일들은 생각지 않고 한해의 시름을 푼다는 술이다. 사철가 말미 가사에도 뜻있는 벗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거드렁거리고 노는 모습이 나온다. 

- 국곡투식하는 놈 부모 불효하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 세상에 먼저 보내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 앉아, 한잔 더 먹소 그만 먹게 하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

‘국곡투식(國穀偸食)’이란 바로 부정 축재를 지칭한 것. 적폐청산 회오리 속에 금년 한해 한국의 정치는 다사다난했다. 내년 예산 심의 과정에서마저 여야 협상은 실종되고 자당의 입장에만 빠져 국가의 장래를 잊고 말았다. 열강 틈바구니에서 자주성이 훼손되는 안보불안도 계속되고 있다. 망망대해 격랑 속을 항해하는 한국호, 지금 좌초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은가. 

다사다난 했던 정유년 한 해 마지막달을 보내면서 잊고 싶은 일들이 많은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게다. 사철가를 음미하며 망년주로 불행했던 일들은 날려버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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