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공약(公約)은 지켜져야 한다. 원론적인 얘기로는 당연하다. 선거에서 유권자 표심으로 확인한 정책공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약에는 우선순위가 있고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것도 많다. 세밀히 분석해보면 과거나 지금이나 어불성설인 것도 있다. 선거에 무조건 이기기 위해 남발된 무책임한 공약(空約)도 있다. 다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선거 방식상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어떤 정책은 좋고 어떤 정책은 싫다고 일일이 개별적으로 의사표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옥석(玉石)을 가려야 한다.

그중에서도 공공부문 일자리 81만개 만들기 같은 공약은 전면 재검토해야 하겠다. 차기 정부는 물론 향후 수십년간 100조원 이상이나 후대에 떠넘긴다. 공무원 증원은 단순 일자리 사업이 아니라 국가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 대선공약이란 이유로 그냥 일방통행식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작금 실업난이 심각한 영국 등 많은 선진국들도 재정지출을 확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삭감하는 상황이다. 거둬들이는 세금을 올려 일회용 선심을 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보다는 거꾸로 경제성장을 통해, 그리고 기업의 활발한 투자를 유도해 청년 일자리를 자연스레 창출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국가재난발생 때 등에만 하도록 돼 있는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강행하겠다는 것도 편법에 가깝다.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지낸 참여정부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련한 추경 가이드라인이다. 이번 추경엔 ‘노인알바’ 등 임시직을 늘리는 것도 들어 있다. 땜질식 세금나줘주기라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응급처방으로 나랏빚만 크게 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필자가 현실적으로 체험한 것을 하나 소개해본다. 필자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노인전문병원의 경우이다. 여성 간병인들이 수십명 일하고 있다. 전국의 의료기관을 감안하면 그 숫자가 엄청나다. 이들은 가족들이 수발할 여건이 안 되는 중환자를 돌보는 보람도 있지만 애환도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치매환자들의 냄새나는 배변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 환자들을 보살피다 보면 밤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기도 어렵다. 3D업종이다. 그러다보니 간병인들은 대부분 재중 동포 여성들이다. 그중엔 훌륭한 자질과 소신을 갖춘 이도 있지만 아무래도 의료서비스의 질이 문제다. 의료실수도 많고 사회·문화적 차이에 의한 이질감, 의사소통 문제 등이 늘 따라다닌다. 환자와 가족의 불편이 보통이 아니다. 간병비 부담도 크다. 치매환자는 건강보험을 확대적용해 비급여인 요양병원 간병비를 급여화하고 간병인 처우를 높여 한국인 요양보호사들로 채워주면 어떨까 싶다. 그렇게 하면 요양보호서비스의 질적 수준이 높아진다. 또한 경력 단절 여성과 경제활동이 가능한 노인 등에게 고소득 일자리와 근로·경제생활의 기쁨을 함께 안겨줄 수 있다. 재중동포인 A씨(66, 여)도 5인실에서 환자돌보미로 일하는 사람. 간병인 생활 10년째인 그는 한국에 부동산을 4채나 소유하게 됐다. 그는 연소득이 3천만원에 이르지만 돈 쓸 여유가 없단다. 번 돈 그대로 저축해 재테크에도 성공적인 노후를 한국에서 보내고 있다는 자랑 섞인 고백이다. 전국의 의료기관에서는 간병 일이 힘든 직군이라며 기피하는 바람에 한국인 간병인 구하기가 밤하늘에 별따기 정도로 힘들다. 무언가 지혜로운 정책적 고려가 필요한 대목이다. 공무원 증원이라는 것은 대증적이고 일차원적인 탁상공론 공약이다.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건져 올린 피부에 와 닿는 정책아이디어라야 국민이 고개를 끄덕이는 일자리 늘리기 정책이 될 것 같다.

새 정부 출범 후에도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선후보 공약으로 귀를 쫑긋하게 했던 ‘북한 방문-남북정상회담’ 공약 실현이 지금으로선 오리무중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주례행사처럼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남북대화에 당위성이 있다고 해도 성급하게 뛰어들거나 북한식 길들이기에 끌려가서도 안 된다. 정부는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국제사회와의 공조 틀을 유지하면서 대북 접근에 차분하고 신중한 입장이다. 공약은 남북한이 오랜 긴장관계를 해소하고 공동번영의 길을 열며 궁극에는 남북통일까지 이뤄내자는 큰 그림이다. 현재로서는 공약 실현에 세심하고 치밀한 모습에 믿음이 간다. 다만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북한 태도가 문제이다. 하지만 남북대화에 박근혜·이명박 정부 때처럼 ‘비핵화’ 등 조건을 내건 입장만을 고수한다면 ‘통일’의 ‘통’자 한번 꺼내보지 못한 채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실기할 수도 있다. 새 정부 출범 직후가 가장 좋은 기회가 아닐까.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한 달여. 한민족 화해와 통일에 대한 많은 국민의 가슴 설레는 장밋빛 기대감이 벌써부터 빛바래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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