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쉬어가기. 운동선수들에게 재충전 시간은 꼭 필요하다. 프로야구 투수가 한 이닝 대량실점을 했다고 운동을 포기할 일이 아니다. 몰매를 맞은 후 푹 쉬고 나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프로골프 선수라고 매주 열리는 대회에 다 꼬박꼬박 참석해 멋진 경기를 하라는 법은 없다. 상금순위 달성도 좋지만 무너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추스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큰 부하가 걸린 근육을 쉬면서 부상도 치료하고 레슨 코치를 찾아 초보자처럼 샷을 다듬는 게 오히려 보약처럼 좋은 계기가 된다. 아예 골프를 잊고 휴식하거나 골프와 상관없는 다른 레저 활동을 즐기다 투어에 다시 복귀해 뛰어난 성적을 내기도 한다.

‘복열심망(伏熱心忙).’ 선서(禪書)에서 읽은 글귀다. 깨달음의 길은 멀고 지난하다. 참선을 한다고 금세 무슨 도통하는 한 소식을 하기 쉬운 게 아니다. 그러다보니 배가 뜨거운 물처럼 부글부글 끓고 마음은 바쁘고 조급해지기 쉽다. 그럴 때는 어떡해야 하나. 불가(佛家)에서는 용맹정진하며 구도의 길에 여념없는 수행승들에게 선지식들이 오히려 “비워야 한다” “내려놓아라” “쉬어가고 쉬어가다 담박 깨달아라” 등의 말을 해준다. 사찰명이나 법명에 쉴 ‘휴(休)’자가 들어간 이름도 많다. 혜민스님이 펴낸 책 이름에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 책은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며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주는 따뜻한 응원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좋은 된장은 묵힐수록 맛이 있다. 훌륭한 예술작품도 고통 속에 혼자 외로이 천착하는 인고의 시간을 이겨내며 생산되는 경우가 많다. 쉬지 않고 앞으로 달리기만 한다고 목적지에 쉽게 닿는 것이 아니다. 걷다가 지치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도 주무르고, 보물지도도 펴놓고 잘 찾아가고 있는지 다시 살펴보자. 좀 숨 돌릴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쉴 때는 쉬어야 이롭다. 정치도, 정치인도 그랬으면 한다.

자유한국당은 민자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이 전신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변 주체세력에 의해 1963년 창당된 민주공화당이 모태다. 그런데 창당 이후 보수 성향의 정당으로서는 가장 인기 없는 당이 돼버렸다. 최근 어느 여론조사에서 당 지지도가 8%까지 떨어지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원인은 다름 아닌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인한 모럴 해저드에 있다. 대다수 국민은 아직도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도덕적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그렇다면 자유한국당은 어떻게 해야 하며, 그 해답은 무엇인가. 우선 탄핵정국에서 통렬한 자기반성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친박’ 국회의원 중 단 한 명도 석고대죄와 함께 정계은퇴를 밝히는 결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친박당’은 해산과 함께 대선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선언이라도 했어야 했다. 조금 심하게 말하는 이는 비굴함과 뻔뻔스러움의 극치였다고 꼬집는다. 그나마 홍준표 경남지사가 후보로 나서 짧은 선거 운동기간에도 불구, 24.03%의 득표율로 비교적 선전했다는 점이 당의 위안거리이다.

문제는 현재의 자유한국당은 과거 자민련과 같은 지역정당으로 갈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홍준표 전 지사가 당권 도전에 나서 성공한다면 ‘도로영남당’으로 전락하고 말 것 같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홍 전 지사는 왜 조급증 걸린 사람처럼 당권경쟁에 나서려는 것일까. 좀 쉬거나, 혹은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감으로 애써 자숙하는 모습을 왜 좀 더 보여주지 못하는 걸까. 필자 주위에는 대선 때 지지했음을 밝히면서도 ‘친홍 줄세우기’와 함께 당권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의 최근 홍 전 지사 행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지인들이 많다. 그는 내년 지자체 선거와 향후 국회의원 재·보선 등을 총지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면서 당의 정체성을 곧추세워야 한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제1야당 대표의 직위에 있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믿거나 말거나’식 분석도 있다.

대선 후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다. 언제까지 무릎 꿇고 엎드려 있으라는 얘기냐고 반문한다면 시기를 콕 짚어 일러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분명하다. 지금은 대선 후보라는 ‘큰 그릇’ 홍준표가 고개 들고 일어설 때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한국당과 홍 전 지사는 보수 혹은 중도 성향 국민이 느끼는 피로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적폐청산’ 구호에 많은 국민이 동의한 것도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 패배를 통절히 인식하고 자성하며 뼈를 깎는 자세로 거듭나야 한다. 지도부를 비대위 체제로 바꾸고 외부에서 참신한 인물을 수혈해서라도 당의 면모를 일신하고 외연을 넓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말 그대로 ‘보수의 궤멸’을 막을 경쟁력 있는 새 인물이 나와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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