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태풍 만난 바다처럼 세상이 한 번 뒤집어질 줄 알았다.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나중엔 제 사람 쓰더라도 정권 초기엔 비문(文)인사들이 등용돼 신선한 느낌이 있다. 단순히 보여주기식 인사가 아니라면 국정운영철학이 담긴 탕평책은 계속돼야 한다.”

앞의 말은 선거 때면 늘 자신을 보수쪽으로 분류하는 한 지인의 최근 언급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무슨 경천동지할 일이라도 벌어질 줄 알았다는 것이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이 생각보다 지금은 안정적으로 잘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후자는 오늘의 문 대통령을 만든 지지자들 중 한 사람이 한 말이다. ‘백락이 말을 관찰하다’라는 말인 ‘백락상마(伯樂相馬)’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난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청와대에서 ‘전화’가 오지 않아 섭섭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성공을 위해서라면 백의종군하며 인내할 수 있다는 심경이다. 예를 들면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 정부에서도 그랬단다. 당시 골수 YS지지자들은 새 정부 참여 기회를 미뤄 나중에 함께해보자는 게 집권 초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 정부의 인사와 국정운영을 사심없이 담담한 마음으로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정중동(靜中動)’ 새 정부는 북핵문제와 남북관계 대처에서도 비교적 오버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3주째 미사일을 쏘았고, 청와대는 이전 정부와 똑같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며 신중함과 단호함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이 핵문제에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지 않는다면 당장 남북정상회담 같은 깜짝 놀랄 뉴스가 생산되지는 않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남북경색국면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과 민간 차원의 남북교류는 물꼬가 트일 것 같다. 8.15광복절이나 추석 무렵에 남북이산가족상봉이나 남북특사교환 같은 진전된 보도가 나올지도 모른다. 안보와 국정 안정이라는 어젠다에는 전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 차분히 국정수행을 해나가며 그 바탕 위에 한반도 상황과 국제사회 여건 등을 감안해 무언가 진일보한 그림을 그려나갈 계획일 것이다. 그러나 냉철히 보자. 선거 때 입장과 다르지 않은가. 우리가 대선 후보 공약을 잘못 알아들었던 것일까. 대선 당시 문 후보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북핵 폐기 전이라도 오히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하겠다는 게 아니었던가. 미국보다 오히려 북한을 먼저 방문하겠다는 게 아니었는가 말이다. 혹시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한 발 물러선 것일까. 북한이 핵을 내려놓아야 대화한다는 입장인지, 아니면 제재와 대화를 투트랙으로 병행하겠다는 것인지 모호한 상황이다. 이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위장전입을 포함한 고위 공직 배제 5대 원칙을 발표했다. 이 기준만큼은 지켜져야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문 대통령 언급은 문제의 근원적 해결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인사 암초를 정면돌파하려는 듯한 해명이었지만 다소 찜찜하고 미진한 편이다. “야당·국민께 양해”라고만 했다. 즉 “사과”나 “유감”보다는 한 단계 아래의 메시지다. 원칙과 실제 현실은 다르니 5대 원칙에 어긋나도 입각시킨다는 뜻인가. 표밭을 의식하고 던진 말에 일일이 다 책임질 수는 없다는 것인가. 호남 지역 정서를 의식한 국민의당이 인준에 찬성해주기로 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이 후보자의 위장 전입이 무슨 치명적인 전력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내세운 원칙이 조변석개하면 높은 지지율도 촛불민심도 언제까지나 흔들리지 않는 상수(常數)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권의 정체성은 국민의 믿음을 바탕으로 부여된다. 메시지의 이행은 그 중요한 기준이 된다.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지나가는 기억이 있다. 첫째는 총선 때 광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지지를 거두시겠다면 미련 없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 대선에도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일이다. 경위야 어찌됐건 결국 총선 민의는 외면됐지 않은가. 다음은 박근혜 전 대통령 사임을 전제로 정치권이 먼저 요구한 거국내각 총리 추천을 끝내 거부하고 탄핵정국으로 몰고 간 일이다. 망국적인 국정공백 장기화가 불가피한 일이었나 말이다. 세 번째, 문자폭탄은 정치인이라면 받아보아야 할 양념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이다. 그래서 문자폭탄 부대가 아직도 해산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다음은 문 대통령의 노무현 대통령 8주기 추도사이다. “이상은 높았고 힘은 부족했다.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회고다. 다만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구태만이 적폐가 아니다. 명분을 잃고 현실과 쉽게 타협하는 것, 정파의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국민을 섬기지 않고 독선으로 나아가는 것 등이 모두 적폐가 아닐까. 진실로 새 정치를 희망할 뿐이다. 어정쩡하게 넘어가는 것은 실패한 과거 정부와 다르지 않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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