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무는 시] 사랑에 부쳐 -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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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부쳐

김나영

산도둑 같은 사내와 한번 타오르지도 못하고
손가락이 긴 사내와 한번 뒤섞이지도 못하고
물불가리는 나이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모르는 척 나를 눈감아줬으면 싶던 계절이
맡겨놓은 돈 찾으러 오듯이 꼬박 찾아와
머리에 푸른 물만 잔뜩 들었습니다
이리 갸웃 저리 갸웃 머리만 쓰고 살다가
마음을 놓치고 사랑을 놓치고 나이를 놓이고
내 꾀에 내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암만 생각해도 이번 생은 패(牌)를 잘못 썼습니다.

 

[시평]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이가 들어 어른스러워진다는 것은 아마도 알 것 모를 것 다 안다는 것이리라. 그래서 어쩌면 나이가 들어 어른스러워진다는 것은 젊은 시절의 그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그 순수한 열정으로 물불가리지 않고 일에 임하기도 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앞뒤 가리지 않고 밀고나가기도 하는 것, 이러함이 젊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음을 좋아한다. 젊음이 다만 젊은 패기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패기와 함께 순수함이 있기 때문이리라.

나이가 들어 생각을 하니, 내 어찌 이렇게 살았는가, 하는 회한(悔恨)이 들 때가 없지 않아 있다. 남들 마냥 뜨거운 연애도 해보고, 또 진탕 놀아도 보며 지냈어도 좋았을 그 시절을 그만 다 놓쳐버린 듯하여, 그래서 이제는 머리에 푸른 물만 잔뜩 든 듯하여, 이리 갸웃 저리 갸웃 머리조차도 쓸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물불가리며 마음껏 하고 싶은 일조차도 하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 

그러나 이 생의 패(牌), 그렇게 잘못 쓴 것만은 아니리라. 자기 꾀에 넘어간 그런 생도 결코 아니리라. 젊음의 그 시간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나이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결코 이 생은 잘못 산 삶이 아니리라. 이런 회한(悔恨) 정도 없는 사람 어디 없겠는가. 문득 나이 들어 한번쯤 해 보는 회한 아닌 회한, 그것은 어쩌면 회한이 아니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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