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김명기(1969~  )

삼복 처서 다 지나 미쳐 달아오른 날, 묵밥집 앞을 지나다 보았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강단 없이 쓰러진 장판 한 귀퉁이, 낡은 철재 옷걸이에 걸려 슬픈 꿈처럼 흔들리던 에르네스 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군화도 신지 않은 채 총도 없이 색 바란 티셔츠들 중 제일 앞에 내걸린 그는 여전히 대장이었다. 얼굴 가득 소금기 머금은 초로의 여인이 가르쳐준 그의 이름은 만 오천 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의 얼굴 위로 몇 방울 땀들이 또옥 똑 떨어져 눈물처럼 번져가는 뜨끈한 오후, 날염된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만지작댔다. 나의 호주머니는 곤궁했으므로……,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바른 그녀가 말없이 검은 비닐봉지 아가리를 벌려 그를 포개 넣었다. 공손히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을 때 그녀는 그의 새 이름을 나지막이 말해주었다. 만 이천 원이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바나, 평양, 이름 모를 볼리비아 어느 숲을 지나 거대한 마트에 짓눌려 몰락한 오일장 판에서 아직도 그는 가난한 자들의 식지 않은 밥 덩어리였다. 식은 밥 덩어리인 나와 꼭 같은 서른아홉이 그의 생물학적 수명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비닐봉지를 든 왼쪽 어깨가 뻐근했다.

 

[시평]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이며 소설가인 프랑스의 사르트르가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극찬을 한 혁명가 체 게바라. 그의 모습이 날염(捺染)으로 새겨진 티셔츠를 북평 오일장에서 만난다. 낡은 철재 옷걸이에 걸려, 슬픈 꿈처럼 흔들리는, 군화도 신지 않은 채, 총도 없이 색 바란 티셔츠들 중 제일 앞에 내걸린, 체 게바라의 모습이 날염된 티셔츠.

얼굴 가득 소금기 머금은 초로의 아주머니로부터 삼천 원을 할인받은 만이천 원에 산 체 게바라.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바른 그녀가 말없이 검은 비닐봉지 아가리를 벌려 포개 넣어준 체 게바라. 한때는 젊은이들의 꿈이었고, 우상이었던 그, 아니 그가 펼친 삶의 혁명들. 그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바나, 평양, 이름 모를 볼리비아 어느 숲을 지나, 한 세기를 건너가듯이, 이제는 티셔츠에 날염이 되어, 어느 이름 없는 시골 오일장 좌판 위에 나앉은 그.

젊은 날의 열정이, 그 열정이 비록 한 세기를 뒤흔들었다고 해도, 이제는 서서히 잊혀져가는 슬픔이라는 그 사실을, 북평 오일장에서 시인은 확인한다. 그러나 그가 비록 잊혀져가고 있다고 해도, 가난한 자들의 식지 않은 밥 덩어리마냥, 우리의 목울대와 가슴을 뜨겁게 타고 내려가는구나. 체 게바라가 날염된 채 그려진 티셔츠가 담긴 비닐봉지를 가지고 오면서, 왼쪽 어깨가 뻐근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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