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비명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함형수(1916 ~ 1946)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시평]

함형수라는 시인은 1916년생이니, 이제는 옛 분이라고 할 수가 있다. 1936년 ‘시인부락’이라는 동인지에 창립 멤버로 참가를 하며 시를 발표했으니, 옛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이라는 예술가의 꿈과 열정을 한 생애 내내 담아내려는 삶을 살고자 했던 시인, 함형수. 연보에 의하면 광복 후 북한에서 정신질환으로 고생을 하다가 작고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죽으면, 생전의 자기 일을 영원히 남기고자, 돌에 글자를 새겨 무덤 앞에 세워놓는다. 이른바 비석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차가운 돌비석을, 뜨거운 생명이 자리하지 않는 그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주문한다. 차가운 돌로 된 비(碑) 대신에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고 주문한다. 그리하여 해바라기라는 정열적인 사랑을, 그리곤 그 정열적인 사랑의 그 끝으로는 끝없이 펼쳐지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고 주문한다. 

노오란 해바라기는 태양같이 찬란했던 화려한 사랑이고,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는 시인. 해바라기라는 생명의 충일함을, 노고지리라는 비상하는 꿈을, 그런가 하면 그러함 속에서 무한히 펼쳐지는 보리밭감은 영원한 평온을 꿈꾸던 시인. 오늘 권력과 부(富)만이 가장 높은 가치인 양 추구가 되는, 오늘이라는 이 처박한 세태 속에서, 이러한 시인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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