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아직 일이 안 끝났나? 저녁은 집에 와서 따뜻한 밥을 먹도록 해래이.”

또 부산서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 목소리. 올해 86세인 어머니는 옛 기억 속에 머물고 있다. 지난해 입원해 척추수술과 재활병원 생활을 거쳐 부산에서 방문요양보호사의 재가노인돌봄서비스를 받았다. 하지만 허리 통증이 계속되고 보행이 쉽지 않다. 인지능력과 기억력도 악화되고 있다. 어떤 날은 5차례나 전화해 서울의 아들에게 혼돈상태의 목소리를 들려주신다. 그러던 어머니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최근 뜸해졌다. 알고 보니 전화번호를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에는 전화하는 방법마저 까마득한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버렸다. 얼마 전까지사회교육문화센터에도 다니고 텃밭도 가꾸며 즐겁게 생활했던 어머니는 휘어진 허리에, 디스크 증상에, 척추협착증까지 심해져 수술을 받았고 의식은 맑은 날과 흐린 날이 반복된다. 전신마취 수술 후유증으로 망상에 시달리는 섬망증이라고 했다. 그러나 1년 반 만에 치매증상 등으로 서울의 한 병원에 재입원한 상황이다. 어머니 심신 상태가 집에서 생활할 수 없을 정도라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의료혜택을 받으며 치료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우울하다. 사드와 북한 핵·미사일, 끝 모를 남북대치국면이다. 강대국들이 으르렁거리는 한반도 주변의 외교적 풍랑이 험하고 거세다. 정치권은 양극단을 치달으며 오기정치에만 몰두한 지 오래. 같은 사안 하나를 놓고도 왜 그리 사사건건 의견이 다르기만 한지 국민을 헷갈리게 한다. 경기가 침체국면을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해운강국이었는데 이제는 물류대란이란다. 정부대책까지 허둥지둥해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총 리콜비용 2조원을 들여 갤노트7 250만대를 전량 교환한다. 배터리 제조 공정의 오차가 폭발의 원인이라니 이미지 손상이 클 것 같다. 소위 배웠다는 이들이 더 문제다. 판사·검사·변호사들이 탈선을 일삼아오다 줄줄이 쇠고랑을 차 민초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니.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일도 없지 않다. 그래도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정직하고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하는 이들이 있다는 반증이다. “잠깐! 먼저 차를 보고 건너가세요.” 부천오정경찰서가 관내 횡단보도마다 내건 푯말이다. 필자 눈에 띈 이 노란 푯말이 바로 생활밀착형 정치, 피부에 와 닿는 행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매년 1만 2000여건의 횡단보도 보행자 교통사고에다, 이로 인한 사망자가 평균 400명이나 되는 현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파란불이라고 무조건 뛰어가면 안 된다. 핸드폰을 보며 건너는 것도 위험함은 물론이다. 푯말 하나가 사람 여럿의 생명을 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포스텍의 변신도 신선한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지금 같은 낡은 시스템으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창의융합형 인재를 키울 수 없다”는 교육변혁 선언이다. 신입생 전원을 학과 구분 없이 단일계열 ‘무(無)학과’로 선발해 11개 학과의 칸막이를 없앤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초·응용과학 전공을 융합한다.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의 데비스 허사비스 같은 인물 배출을 위해 교수들이 전공 이기주의를 버리자는 것이다. 교수 임용에도 학벌주의, 박사만능주의를 깨겠다고 한다. 또 불거진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를 둘러싼 영역다툼. 의료계에서는 신경과와 정신건강의학과의 주장이 서로 팽팽한 평행선을 달린다. 그러나 환자나 보호자는 불안하다. 서로 정밀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지, 협진은 되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고객입장에서는 그렇다. 신경과 의사들이 약값문제로 우울증 치료에 제한을 받고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현실부터 기본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창의적 융합이 절실히 필요한 또 하나의 무대가 있다. 집단이기주의, ‘친박’ ‘친문’ 등 극단주의를 버려할 곳은 정치권이다. 정치인들이 포스텍의 획기적인 교육실험에 ‘앗!’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보기 드물게 괜찮은 병원입니다.” 어머니가 입원하던 날, 같은 병실의 환자보호자가 필자에게 살짝 귀띔해준 말이었다. 보건복지부 공공의료평가 3년 연속 최우수. 90% 다인병실 운영, 항생제 적정성 평가 1등급… 처음엔 가슴에 선뜻 다가오지 않는 평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필자도 공감하게 됐다. 서울특별시 서남병원. 시립이요, 이화여대의료원 위탁운영병원이다. 이 병원은 놀랍게도 그 지긋지긋한 주차비, 말 많은 선택진료비부터 아예 없다. 그리고 가식 없는 친절함과 자연스러움으로 고객을 편안하게 한다. 의료진, 간병사, 행정직원들 모두 하나같이 선(善)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끔. 우리나라의 정치도 부천오정경찰서나 서남병원 사람들처럼 선(善)한 사람들이 했으면 좋겠다. 누구 막강한 권력자 편이 아니라 진실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편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