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재치국 사소~”

어릴 적 이른 새벽이면 아침잠을 깨우던 여인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있었다. 재치국은 재첩해장국을 일컫는 부산사투리. 골목에서 듣던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한 번에 본다. 근 사십여년 전 일이었던가. 아줌마들이 재첩국을 팔러 다니는 교통편인 동해남부선 열차 안에서였다. ‘몸빼바지’에 양철 물동이를 머리에 인 여인들이 모이자 열차가 시끌벅적해지며 활기가 돌았다. 새벽 일찍 눈 비비며 열차에 오르내리는 억척 여인들의 삶이었다.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부추재첩국 내음이 객실에 번지며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필자는 경주에서 열린 문중 시제에 참석하기 위해 할아버지와 함께 이 열차를 탔다.

“경주는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고도(古都)이지.”

할아버지는 군자금을 모으러 힘들게 뛰어다니던 옛 생각에 가끔씩 회한에 잠기곤 했다. 그리곤 혼자 가슴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비밀 얘기들을 어린 손자에게 하나씩 꺼내 주셨다. 역사여행이 되어준 부산발 경주행 완행열차. 쬐그만 역들을 지나며 기차가 달릴 때 필자는 잠시도 창밖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민족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하의 절경이 꼬불꼬불한 해안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새하얀 뭉게구름,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깔깔대는 바다새, 고무줄처럼 넉넉한 곡선으로 그려진 수평선, 옹기종기 텐트가 앉은 백사장, 평화로운 어촌마을, 외롭지만 이웃을 지켜주는 등대, 기암절벽, 바위섬, 동굴, 소나무 숲, 이름 없는 암자….

아침 열차로 도착해본 경주는 문자 그대로 고도였다. 때마침 만추. 고즈넉한 옛 왕국의 숨결과 정취가 가득했다. 낙엽이 가을바람에 보도에 수북이 떨어져 신라 천년의 빛나는 문화유산들과 함께 역사적 정한에 젖은 로맨티스트 조손(祖孫)의 발걸음을 말없이 반겨주기도 했고. 아름다운 풍광이 그리워 얼마 전 멋진 31번 국도를 이용해 보았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부산 해운대에서 포항 호미곶까지 펼쳐진 동해안 풍광을 있는 그대로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고 눈에 거슬리는 모습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시무시한 원자력발전소와 거대한 송전탑들의 흉물스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악취와 유해·유독가스로 끊임없이 주민들을 괴롭히는 온산화학공단이었다. 요즘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겠지만 군사정부였으니 일방적으로 강행할 수 있었을 터. 급기야 경주에 진도 5.8의 지진이 발생했다. 문제는 활성단층지역에 원전 14기가 모여 있다는 사실. 원전은 위험하고, 화력발전은 환경오염이 심각하다. 대책은 무엇인가. 국민생명과 원전의 안전성 여부가 달려있는 단층 조사부터 서둘러야 한다. 러시아의 체르노빌 사태, 동일본지진과 쓰나미에 따른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보고도 가만있어서는 안 된다. ‘소형모듈원전(SMR)’이라고 불리는 제4세대 소형 원전을 땅속에 설치하는 것이 일차적인 대안이다.

중·장기적으로는 녹색 청정에너지에 눈을 돌려야 한다. 중국은 2030년까지 무려 175억 달러를 투입해 전기의 26%를 풍력발전으로 대체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대통령 후보는 대규모 태양광 발전 프로젝트를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다. 한국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잠재량도 지난해 사용한 전력량의 22배 이상이라는 집계도 있다. 앞으로는 미래지향적이고 친환경적인 산업이 다름 아닌 돈이 된다. 더 지체하면 늦는다. 원전의 장점만을 앞세우면 안 된다. 대선후보들도 후손에게 물려줄 한반도의 백년대계를 생각하자. 그런 방향으로 지혜를 모으지 않으면 하늘의 버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 하늘이 노한다는 것을 정치지도자들이 알아야 한다.

필자의 조상 묘소 일부가 울산 바닷가 전망 좋은 산자락에 있었다. 일방적인 정부 결정으로 70년대에 온산공단이 세워지면서 선산이 통째로 없어졌다. 산을 파헤칠 때 공사 인부 2명이 이유 없이 사망했다. 산이 대노했다는 말이 나오자 공단 측에서 사당을 지었다. 당시 필자의 할아버지와 선친이 그 사당을 다녀와 씁쓸해하며 말했다. “조상님 뵐 면목이 없구나. 선산을 잃고 그곳에는 시끄러운 망치소리와 이상한 냄새만 가득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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