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청이 북경을 점령한 후에도 명의 잔존세력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명의 역대 황제들은 대부분 무능했지만, 유교적 윤리관으로 무장된 사대부들이 백성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으로 들어 왔을 때 피하지 않고 매산(媒山)에 올라가 자살한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역할도 컸다. 그러나 숭정제는 재위 17년 동안 53명의 내각대학사를 교체했고 꺼져가는 왕조를 지키던 명장 원숭환(袁崇煥)마저 청태종의 이간책에 넘어가 살해했다. 제국을 지킬 유능한 인재는 보이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명은 청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자중지란으로 무너졌다. 황제로서는 무능했지만, 그의 죽음은 끈질긴 저항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1644년 3월, 북경이 함락된 후 복왕 주유숭(朱由崧)이 봉양(鳳陽)총독 마사영(馬士英)의 추대를 받아 남경에서 즉위했다. 이 작은 조정은 강남 일대에서 반청복명운동의 중심지로 변했다. 복왕의 조정은 항청을 사가법(史可法)과 같은 장군들의 활약으로 일시적이나마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급조된 복왕의 조정은 내분으로 제대로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멸망했다. 이후에도 단명한 조정이 등장했다. 이 사건은 ‘명사(明史) 장국유전(張國維傳)’에 단 세 단원의 문장으로 남아 있다.

“남도가 무너지자 항주의 감국 노왕(潞王)은 불과 며칠 만에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노왕이 주상방(朱常淓)이다. 원래 대청강경론자인 사가법은 노왕을 옹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사영이 선수를 쳐서 복왕을 옹립했다. 사가법은 남경에서 밀려나 양주에서 강북의 군대를 지휘했다. 노왕은 항주로 도망쳤다. 복왕은 주색이나 밝히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노왕은 번왕들 가운데 비교적 뛰어난 인물이었다. 마사영은 유능한 황제보다 자기가 요리하기 좋은 황제를 택했다. 이런 남경조정의 운명은 뻔했다. 1년 후 청의 예친왕 도도가 사가법을 격파하고 남경을 점령했다. 복왕은 사로잡히고 마사영은 태후를 호송하여 항주로 도망쳤다. 복왕이 잡혀갔으므로 태후는 누군가를 황제로 대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사영은 심복 완대성, 원굉훈과 상의하여 노왕을 감국으로 삼았다. 노왕은 복왕과 달리 상당한 품위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거문고, 서예, 그림에 능했고 골동품 수집가였다. ‘지북우담(池北偶談)’에는 노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노왕은 고상한 풍모를 지녔다. 일찍이 거문고 3천장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장안의 시장에는 예서체로 ‘중화(中和)’라는 글자를 써 넣은 노왕의 거문고 하나가 있다.”

노왕은 불심이 깊었다. 커다란 자라의 뱃속에서 관세음보살상을 구해 벽에 걸어두고 수시로 예불을 올렸다. 우아한 선비이자 거사였던 그는 평시였다면 자신의 품격을 잘 지키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망하고 감국이라는 과분한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우아함은 지나친 호사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했다. 노왕은 비록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간신을 몰아내고 현명한 신하를 구하여 군사를 일으켜 잃어버린 국토를 되찾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왕사임(王思任)은 마사영을 참수하여 해내에 그 사실을 알리고 군주를 속여 나라를 망치려는 자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못했던 노왕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그들을 설득했다.

“화기가 충만해야 좋은 일이 일어나고,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오늘의 일은 선생과 마사영이 상의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노왕이 감국이 되었을 때 이미 청군이 당서(塘栖)에 도착했다. 며칠 후 청군이 무림문을 공격하자 마사영과 완대성은 황급히 도망쳤다. 노왕은 청병의 투항권고문을 받아들여 친히 담판을 펼쳤다. 유일한 조건은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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