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북위가 동서로 갈라지자 중국은 소연(蕭衍)이 세운 남조의 양(梁)과 함께 삼국의 분열시대로 접어들었다. 객관적 국력이나 문화적 측면에서는 서위가 가장 약했다. 과거 정치적, 문화적 중심이었던 관농은 외진 곳으로 변했다. 그러나 우세한 문명은 야성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다. 서위에는 우문태(宇文泰)라는 영웅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과 북방민족의 강점을 융합한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AD 550년, 동위의 고양(高洋)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제(齊)로 정했다. 그가 북제 문선제(文宣帝)이다. AD 557년, 서위도 멸망하고 우문씨의 북주가 세워졌다. 같은 해 남조도 양이 망하고 진(陳)이 세워졌다. 제, 주, 진의 삼국시대가 열렸다. 문선제 사후에 화사개(和士開)가 정적을 축출하고 조정을 장악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밉상이었다. 화사개는 황제에게 빨리 태자에게 선위하여 종실과 외정의 신하들이 황제 사후에 제위를 찬탈하는 것을 방지하라고 권했다. 태자 고위(高緯)가 후주로 즉위했다. 화사개의 권력은 더욱 강화됐다.

황문시랑 풍자종(馮子琮)은 태후의 형부 자격으로 조정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화사개와 한 패거리였으나 외척이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풍자종은 화사개를 축출하고 권력을 독점하고 싶었다. 고심하던 그는 종실인 낭야왕 고엄(高儼)과 결탁했다. 태후의 신임을 받던 고엄은 여러 요직을 겸하면서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고 아버지 세조에게 형은 유약하다고 비난했다. 세조는 그 기세를 칭찬하며 후주를 폐한 후에 그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가 여의치 못하자 앙앙불락하며 권세를 휘두르는 화사개와 목제파(穆提婆)를 미워했다. 화사개와 목제파는 고엄을 북궁으로 옮겨 5일에 한 번씩 태후를 만나게 했다. 나중에는 고엄의 병권마저 회수했다. 풍자종이 화사개가 고엄과 태후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부추겼다. 고엄이 화사개를 죽이려고 하자 풍자종도 고엄을 황제로 옹립하겠다고 약속했다.

고엄이 화사개를 탄핵하는 표를 올렸다. 풍자종이 다른 공문서에 끼워서 보고했다. 후주는 무심코 비답을 내렸다. 고엄이 조칙을 앞세워 화사개를 죽였다. 처음에 고엄은 화사개만 죽이고 일을 끝내려고 했지만 일단 일이 시작되자 멈출 수가 없었다. 풍자종은 고엄에게 제위를 탈취하라고 권했다. 고엄은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천추문으로 갔다. 이 때 쌍방 모두 주목하지 않던 숙장 곡률광(斛律光)이 끼어들었다. 누가 그의 지지를 받느냐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 나는 상황이었다. 고엄도 후주도 그를 다급하게 불렀다. 곡률광의 마음은 후주에게로 기울었다. 궁으로 들어간 곡률광은 후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린 아이가 군사들을 데리고 장난을 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가 후주를 모시고 천추문에 나타나자 놀란 군사들은 절반이 넘게 도망쳤다. 후주가 말을 멈추고 고엄을 불렀다. 고엄이 움직이지 않자 곡률광이 다가가 달래서 데려왔다. 후주는 고엄의 귀싸대기를 몇 차례 때린 후에 궁으로 데려갔다가 죽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4세에 불과했다. 풍자종과 고엄 일당은 모두 살해됐다. 힘을 합쳐도 삼국의 정립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저희끼리 싸움질을 펼쳤으니 북제가 망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세조와 후주 사이에서 절묘한 솜씨로 정권을 잡은 화사개는 다른 계략을 꾸미다가 뜻밖에 풍자종이라는 강적을 만나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져나가는 횡액을 만났다. 풍자종은 후주와 낭야왕 사이에서 나름대로 종횡무진했지만, 뜻을 이루기 일보 직전에 곡률광이라는 인물의 말 한 마디로 애써 만든 기회를 무산시키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강적 가운데 또 다른 강적을 만나면 제 아무리 날고뛰는 재주로 큰소리를 치다가도 한 방에 날아가고 만다. 모략을 주도하는 사람은 이런 점을 유의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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