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사계좌(査繼佐, 1602~1672)는 절강 해령 출신으로 자를 이황(伊璜), 초명을 계우(繼佑)라고 했다. 과거시험을 볼 때 실수로 우를 좌(佐)로 적은 후부터 아예 계좌로 고쳤다. 명말인 숭정 6년에 33세로 과거에 급제했다. 명이 망한 후 노왕(魯王)의 지방관이 되어 황종희(黃宗羲)와 함께 반청복명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해령(海寧)으로 진출해 소금을 장악하고 태호에서 호걸들을 모아 청군과 싸웠다. 노왕의 군대가 패하자 사계좌는 해상으로 도망쳤다. 명왕조를 다시 세울 희망이 사라지자 이름을 감추고 고향을 떠나 유랑했다. 강희제가 즉위한 후 천하의 판세가 확정되자 귀향했다.

사계좌는 시와 그림이 능해서 서화쌍절이라고 불렀다. 항주로 온 그는 서호 부근의 절이나 약방에 머물면서 명왕조의 유신들과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기인 오육기(吳六奇)와의 사귐은 유명하다. 어느 해 겨울 해령의 집에 있을 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쳤다. 사계좌는 누군가와 눈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싶었다. 마침 체격이 큰 거지가 남루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 추위를 전혀 느끼지 않는 것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처마 밑에서 눈을 피하고 있었다. 사계좌가 그를 불러서 혹시 세상에 이름난 철개(鐵丐)가 아니냐고 물었다. 거지가 그렇다고 하자 함께 술이나 마시자고 권했다. 시동이 커다란 술통을 가지고 오자 철개는 단숨에 몽땅 마셨다. 철개는 큰 잔으로 사계좌는 작은 잔으로 대취할 때까지 마셨다. 30통의 술을 마셨지만 철개는 끄떡도 하지 않았고, 사계좌만 대취하여 침실로 들어갔다. 철개는 처마 밑에서 잤다. 날이 새자 사계좌는 두툼한 옷 한 벌을 철개에게 주었다. 철개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이듬해 서호의 방학정을 찾은 사계좌는 다시 철개를 만났다. 철개는 여전이 벌거숭이처럼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사계좌가 옷을 어떻게 했느냐고 묻자 철개는 술과 바꾸었다고 대답했다. 사계좌가 혹시 글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철개는 차라리 글을 읽지 않았다면 거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철개의 본명은 오육기이며 관찰사 오도부(吳道夫)의 후손이었다. 사계좌가 구걸하게 된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선현도 문전걸식을 했는데 왜 부끄럽겠소? 거지가 아니었다면 당신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오. 내가 한신은 아니지만 밥 한 그릇 얻어먹은 은혜는 잊지 않겠소.”

사계좌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하고 사과했다.

“눈이 있어도 태산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감히 술벗이나 하려고 했으니 죄송합니다.”

사계좌는 주석을 마련하고 오육기와 고금의 일을 토론했다.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속내를 털어놓고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계좌는 옷과 노자를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나중에 군문에 들어가 광동의 수륙사제독이 된 오육기는 사람들에게 늘 천하에서 자기를 알아 준 사람은 사계좌뿐이라고 말했다. 강희초년 오육기는 지방행정조직을 정비하면서 사계좌를 광동으로 초청했다. 오육기는 사계좌를 상좌에 앉히고 감사했다.

두 사람은 1년 동안 함께 지냈다. 하루는 제독부의 정원을 거닐던 사계좌가 귀신이 도끼로 다듬은 것처럼 아름다운 돌 하나를 발견했다. 사계좌는 추운(皺雲)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애지중지했다. 열흘 후 다시 보러 가니 어디로 가고 없었다. 해령의 집으로 돌아오자 추운이 정원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육기가 보내 준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추운은 사계좌와 오래 함께 하지 못했다. 사계좌가 문자옥으로 하옥되자 오육기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사계좌는 석방됐지만 추운은 다른 사람이 차지했다. 나중에 채광문이 많은 돈을 주고 사서 복엄사에 두었다. 청이 망할 때까지 많은 명사들이 추운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대부분 진귀한 돌과 두 사람의 우정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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