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지금 중국에서는 공자가 부활하고 있다. 후메이 감독이 만든 영화 ‘공자’에서는 성인의 이미지를 벗고 조국의 위기를 구하는 전략가로 변신했다. 묵자도 ‘묵공’에서 제자 혁리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정작 중국에서도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묵자는 2천년 전인 한나라 초기에 그 모습이 문자로 드러났다. 유학의 중시조로 추앙받는 동중서(董仲舒)도 별도의 열전이 없을 정도로 냉대의 대상이다. 내가 글을 배운 것이 가장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때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읽은 후였다. 그의 붓은 위대했다. 갖가지 색깔의 인물들이 그의 붓을 통해 등장했으며,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위로는 제왕과 장상으로부터 아래로는 자객과 유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지만, 아쉽게도 묵자와 동중서는 별도의 전기를 남기지 않았다. 묵자는 ‘맹자순경열전’의 마지막에 겨우 24개의 글자로 겨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명가(名家)의 대표적 인물인 공손룡(公孫龍), ‘법경(法經)’의 저자로 지력(地力)을 최대한 활용해 국가를 부유하자고 주장한 이회(李悝), 잡가(雜家)의 대표적 인물인 시자(尸子), 도가의 인물인 장로(張盧), ‘우자(吁子)’의 저자로 알려진 우영(吁嬰) 등과 함께 거론됐지만, 순서로는 그들보다도 뒤에 편성됐다. 유가와 양대산맥을 이룬 위대한 인물에 관한 기록치고는 너무도 초라하다. 

동중서는 ‘춘추’를 바탕으로 유가의 철학을 정치철학 또는 종교철학으로 변모시켜 유가를 국가운영의 기본사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다. 사마천이 한왕조의 제도개혁을 주창했다면, 동중서는 이러한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늙어서 재상으로 임명됐다는 상징적 의미밖에 없는 공손홍(公孫弘)의 열전은 별도로 편성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동중서는 ‘유림열전’에 넣었을 뿐이다. 건원 원년인 BC 140년, 동중서는 유명한 ‘천인삼책’을 한무제에게 올려 엄청난 정치적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 사실도 기록하지 않았다. 반고(班固)가 ‘한서’에 ‘동중서전’을 별도로 편성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사마천이 동중서가 차지하는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그에 대한 반감을 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사마천은 ‘유림열전’에서 동중서를 도의를 버리고 몸을 보존하는 데 급급한 인물로 넌지시 풍자했다. 사마천에게는 이러한 동중서의 태도가 도의를 취하기 위해 살신성인하는 원시유가의 인격과 배치되는 행위였다. 게다가 종교철학의 핵심인 천명(天命)에 대해 사마천은 동중서와 견해가 달랐다.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주장한 동중서에게는 천명이 사람을 구속하는 두려운 존재였지만, 사마천은 ‘백이열전’에서 ‘혹자는 천도(天道)는 공평무사하여 항상 착한 사람을 돕는다고 하지만, 인덕을 쌓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굶어서 죽었으며, 가난했던 안연(顔淵)은 거친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죽었으니’ 하늘이 착한 사람을 돕는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말한 ‘어떤 사람’은 동중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사마천에게 천도는 자연의 법칙이므로 인간은 천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는 강력한 개성을 가진 인물을 높이 평가해 열전에서 다양한 인간상을 그릴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동중서는 군주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을 바람직하게 여겼다. 사마천은 자유로운 개성과 인간의 능력을 중시했던 전국시대 인물들의 감정이나 기질을 버리지 않았다. 게다가 사마천은 의(義)와 이(利)를 동등하게 평가했지만, 동중서는 의만 중시하고 이는 무시했다.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사마천은 동중서의 가치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묵자에 관한 사마천의 인식도 동중서를 보는 것처럼 편견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위대한 사가에도 편견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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