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후한 말의 전주(田疇)는 천진 출신으로 자를 자태(子泰)라고 했다. 독서를 좋아했고 격검에 능했다. 22세에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에게 발탁됐다. 밀사가 되어 황제의 조칙을 받으려고 장안으로 가서 기도위로 임명됐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유우는 이미 공손찬에게 피살됐다. 전주는 유우의 묘를 찾아가 황제의 조칙을 올리고 곡을 했다. 공손찬은 화가 났지만 그의 당당한 기개를 높이 평가해 방면했다. 전주는 주군의 복수를 맹서하며 서무산(徐無山)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모셨다. 명성을 들은 5천여 가구가 모여들었다. 원소(袁紹)와 그의 아들 원상이 정중히 초대했지만 끝까지 가지 않았다. 건안 12년(207), 오환정벌에 나선 조조가 그를 불렀다. 전주가 응하려고 하자, 그를 따르던 사람이 원소 부자가 5차례나 불러도 가지 않더니 어떻게 한 번에 수락하느냐고 물었다. 전주는 네가 알 만한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전주를 만난 조조는 다음날 전자태는 나의 부하가 될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의 도움으로 오환을 정벌한 조조가 제후로 봉하고 식읍 500호를 주었다. 전주는 주군을 구하지 못한 사람이 이득을 챙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사양했다.

요동에서 원상의 머리를 베어 보내자 전주는 명령을 어기고 조문했다. 조조는 그를 문책하지 않았다. 배송지(裵松之)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전주가 조조를 도왔기 때문에 원상이 죽었다. 적으로 대했다가 의리를 내세워 조문한 것은 무슨 일인가? 조조의 상을 사양한 것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다. 왕수(王修)가 원담을 위해 곡을 한 것과 비교하면 겉모습은 같았지만 진심이 달랐다.”

전주는 가속과 종족을 이끌고 업(鄴)으로 옮겨서 살았다. 조조가 보낸 재물은 모두 종족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후에도 조조는 몇 차례나 작위와 재물을 주었으나 전주는 끝까지 사양했다. 조조는 전주의 사양이 자신의 권위를 상하게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누군가 전주가 구차스럽게 작은 절개를 지키려고 법과 제도를 무시하니 처벌해야 한다고 탄핵했다. 조조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세자 조비(曹丕)와 대신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조비는 그의 절개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욱(荀彧)은 약간 아니꼬운 말투로 필부는 자기의 뜻을 고집하고, 성인은 해야 할 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종요(鍾繇)는 대의와 합치하지는 않지만 사양하는 풍조를 일으킨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깎아내렸다.

조조는 전주가 사양할수록 어떻게든 그를 제후로 봉하고 싶었다. 전주는 평소에 하후돈(夏侯惇)과 친했다. 조조가 하후돈에게 전주를 찾아가 우정을 앞세워 설득하되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후돈의 생각인 것처럼 말하라고 당부했다. 하후돈은 전주를 찾아가 조조가 당부한 것처럼 말했다. 전주는 하후돈의 뜻을 짐작했기 때문에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후돈은 떠나면서 전주의 등을 가볍게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군! 주군의 뜻이 그렇게 간절한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

“무슨 말을 하는가! 나는 의리를 등지고 숨어 사는 사람에 불과하네. 이미 은혜를 입고 이렇게 편히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어찌 노룡에서의 공을 앞세워 관작을 받겠는가? 국가를 제도를 무시하고 개인의 뜻을 지키는 나는 괴롭지 않겠는가? 장군께서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실 것이니, 어쩔 수 없다면 나 스스로 목을 벨 수 있게 해 주겠는가!”

전주는 말을 마치기 전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조조는 그를 더 이상 굴복시키지 못한다고 판단해 의랑(議郞)으로 삼았다. 전주는 46세에 죽었다. 자그마한 공을 앞세워 상을 받으려고 안달하는 세태에 천하의 조조가 주는 상마저 거절한 전주의 의리를 다시 생각해본다. 부귀는 명예와 나란히 거론될 가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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