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북송 시대 문단에는 왕안석(王安石)과 소동파(蘇東坡)라는 양대거두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이 함께 태산에 왔을 때 벌어졌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물론 두 사람이 정말 함께 태산에 왔다는 기록은 없지만, 워낙 유명한 사람들이라 누군가가 태산과 관련된 이야기를 꾸몄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한 태산의 기세나 제연구점(齊烟九点)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감탄했을 것이다. 또 진송(秦松)이나 한백(漢柏)의 고색창연한 자태도 보고, 맑은 물이 계곡을 흐르는 소리나 새소리를 듣기도 했을 것이다. 대단한 문학가였으니 시부를 짓기도 했을 것이다. 대묘를 찾은 두 사람은 태산신에게 경건하게 절을 하며 비석에 새겨진 글씨도 감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많은 비석 가운데 하나가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도 흥미가 있었지만 다른 수행원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밑면의 오구(烏龜)가 기울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며, 어떤 사람은 오구가 동해를 향해 머리를 숙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왕안석은 문득 장난기가 발동하여 소동파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소형! 이 비석을 보시니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시 한 수 짓지 않겠습니까?”

소동파는 지난날 왕안석과 농담을 했다가 황주(黃州)로 쫓겨났던 일이 생각났다. 어느 날 소동파가 왕안석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왕안석이 출타하고, 탁자 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작야서풍과원림(昨夜西風過園林), 취락황화만지금(吹落黃花滿地金).
지난 밤 서풍이 원림을 지나갔는데,
바람에 국화가 떨어져 땅바닥이 황금빛으로 변했구나.

글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소동파는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덧붙였다.

추화불비춘화락(秋花不比春花落), 설여시인자세음(說與詩人仔細吟).
가을꽃은 봄꽃이 떨어지는 것보다 못하니,
시인은 자세히 보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오.

왕안석은 소동파가 황주로 쫓겨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스스로를 국화꽃잎에 비유했다고 탄복했다. 소동파는 지난날 왕안석에게 당했던 것이 억울해 이번에는 그를 놀려주려고 작정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왕안석에게 보여주었다.

한당년안석부정(恨當年安石不正)
지난날이 원통하여 돌도 바른 자세로 편안하게 있지 못하는구나.

왕안석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인 안석(安石)에 부정(不正)이라는 말을 붙인 소동파의 저의를 재빨리 알아채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소동파에게 보여주었다.

도여금잉향동파(到如今仍向東坡)
지금 찬찬히 살펴보니 여전히 동쪽 언덕을 보고 있구나.

두 대가의 장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고 한다. 소동파도 왕안석의 기지를 보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동파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였으나, 사람됨이 밝고 도량이 넓었다. 왕안석이 변법을 제창했을 때, 소동파는 거기에 반대를 했으나, 왕안석이 죽고 난 후에는 오히려 왕안석의 청묘법(靑苗法)이 발효된 후에 백성들이 살기가 좋아졌다고 생각해, 왕안석과 치열한 정치적 논쟁을 펼친 재상 사마광(司馬光)의 면전에서 왕안석을 변호했다. 삭막한 언어로 정적을 공격하는 저속한 품격밖에 보여주지 않는 작금의 정계를 보며 한 마디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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