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콤플렉스는 일반적으로 감정에 의해 복합적으로 통합된 심리상태를 가리킨다. 간단히 규정하면 ‘마음속의 응어리’이다. 칼 융에 따르면 콤플렉스는 누구나 의식적, 무의식적 상태로 심리와 결합된다. 본인이 의식하게 되면 이성적 통제를 통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무의식적 상태로 깊이 들어가면 병리적 작용을 하게 된다. 콤플렉스는 대체로 유년기의 갈등이 원인이다. 사명대사의 출가와 이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콤플렉스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전형적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소임숭재대임홍(小任崇載大任洪), 천고간흉시최웅(千古姦兇是最雄).
천도호환응유보(天道好還應有報), 종지여골적표풍(從知汝骨赤飄風)?
작은 임숭재와 큰 임사홍,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
천도는 돌고 돌아 보복이 있으니, 네 뼈도 바람에 날려갈 것을 알았겠느냐?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각각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주도해 연산군을 패악무도한 군주로 만들었다는 임사홍(任士洪 1445~1506)을 비난한 중종실록에 포함된 시이다. 이 임사홍이 바로 사명대사의 선조이다. 풍천임씨인 임사홍과 그의 아들이 중종반정으로 몰락할 때 일족이 밀양 무안 고라리로 낙향했다. 밀양은 조선 초기의 통치이념의 기틀을 마련한 변계량(卞季良, 1369~1430)과 영남 사림의 종장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을 배출한 곳으로 유학의 거대한 학맥이 이어진 곳이다. 임사홍의 차남 임희재(任熙載)는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였다. 연산군에게 미녀를 바치는 채홍사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임사홍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임희재마저 냉담하게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다. 밀양 무안 출신인 김종직은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야은 길재(吉再), 부친인 김숙자(金淑滋)의 학풍을 이어 영남사림의 종주로 성장했다. 그의 제자 김굉필(金宏弼)이 기른 조광조(趙光祖)가 중종의 시대에 도학정치를 펼치다가 기묘사화로 참혹하게 처형되면서 사림은 정치무대에서 몰락하고 말았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라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동향의 위대한 인물을 몰락하게 만든 원흉이 자신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사명대사가 몰랐을 리가 없다.

땀을 흘리는 비석으로 유명한 무안의 ‘사명대사비명’과 ‘송운대사행적’에 따르면 7세에 조부 임종원(任宗元)으로부터 사략(史略)을 배웠으며, 13세에 황악산 유촌의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우다가 김천 직지사로 들어가 신묵화상(信黙和尙)의 문하로 출가했다. 유학으로 입신양명을 꿈꾸던 소년이 갑자기 출가했던 배경에는 분명히 충격적인 콤플렉스가 작용했을 것이다. 대사 자신은 임진란 도중에 올린 상소문과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에서 15세 전후에 부모를 잃고 가세가 기울어 출가했다고 토로했다. 18세에 선과(禪科)에 장원급제하여 봉은사에 머물던 대사는 박순(朴淳), 이산해(李山海), 고경명(高敬命), 최경창(崔慶昌), 임제(林悌), 이달(李達) 등 사대부들과 교류했고 특히 장서가로 유명한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많은 책을 빌려서 읽었다. 임진란 직전에 세상을 뒤흔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다가 강릉 사림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정은 관직으로 들어가 입신할 수 없었던 소년시기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백산에서 떨어지는 꽃을 보고 문득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은 이후 비로소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 수행과 세속의 경계를 없앤 무애(無碍)의 경지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다. 대사는 세속권력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전쟁의 와중에서 불도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피안의 이상향이 아니라 현세의 구원을 위한 거대한 구도를 그려냈고, 비로소 가계에 잠복된 콤플렉스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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