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이경림(1947~ )

화단 귀퉁이에 탁구공만 한 구멍이 있다
그 구멍으로 개미들이 나온다 개미의 길이다
구멍은 개미의 몸만큼 통로를 열어주고는
어둠으로 뚜껑을 닫았다 새앙쥐 한 마리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내민다 구멍은 문을
한껏 열어 새앙쥐를 내보낸다 새앙쥐의 길이
휑하다 바퀴벌레 한 마리 쏜살같이 나온다
바퀴벌레의 길, 그리마의 길, 쥐며느리의 길,
이름 모를 털벌레의 길, 구멍은
하루 종일 뚜껑을 닫았다 열었다 하며 거기 있다
비 오면 물의 길, 바람 불면 바람의 길이다
어둠은 구멍에 몸을 꼭 맞추고 없는 듯 있다
밤, 구멍은 더 큰 어둠에 지워진다
쥐라도 들락거려야 몸이 보인다 구멍은

[시평]
모든 존재는 다른 무엇과의 관계 위에서만이 비로소 그 존재가 드러난다. 나는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가 되고, 집사람과의 관계에서 남편이 되고,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선생이 되고, 또 그 대상에 따라 아저씨도 되고, 손님도 되고, 청중도 된다.

어딘가로 열려 있는 화단 귀퉁이 작디작은 구멍 하나. 개미가 나오면 개미의 길이 되고, 생쥐가 나오면 생쥐의 길이 되고, 바퀴벌레가 나오면 바퀴벌레의 길이 되고, 비가 오면 물의 길, 바람이 불면 바람의 길이 되는 작디작은 구멍 하나.

저 작은 구멍이, 아무러한 의미도 없는 듯이 뚫려 있는 듯한 저 구멍이 비로소 구멍으로서 자리하게 되는 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 위에서 가능하듯이, 아무리 스스로 잘나고 잘났다고 으스대는 사람도 결국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드러난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을 실은 우리 모두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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