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임성숙(1933~ )

희끗희끗
후줄근한 은발새치
세월을 재촉하는 중늙은이

부스럭부스럭 ……
…… 구시렁구시렁
뒤꼍 마당 한 바퀴 휘휘 돌아서
머무적머무적 ……
…… 후들 후들
가을비에 업혀 먼 꿈길 더듬어간다

먼 먼 곳으로

[시평] 
비는 계절에 따라 그 내리는 느낌이 다르다. 봄비는 마치 아기가 아장아장 걷듯이 내리는가 하면, 여름비는 쭉쭉 시원하게 내린다. 그런가 하면, 어쩌다 오는 겨울비는 추적거리듯 내리고, 가을비는 왠지 구시렁구시렁 내리는 듯하다. 마치 세월을 재촉하는 중늙은이, 그 중늙은이의 구시렁거리는 모습 마냥 내린다.

이제는 그리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살아온 날들보다는 살 날들이 많지 않은, 머리가 희끗희끗하니 은발의 새치가 생기는 그러한 나이. 그래서 마치 가을비 마냥 후들후들, 머뭇머뭇, 뒤꼍 마당이나 한 바퀴 휘휘 돌고 도는 삶.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돼버린, 그 지난날의 시간이나 더듬으며, 가을비에 업혀 먼 꿈길 더듬듯, 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가을비 내리는 어느 오후. 가을비 마냥 한 생애 구시렁거리며 덧없는 삶의 한 때를 그저 떠돌고 있을 뿐이다. 늙음이라는 낯선 그 시간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만 한 발을 옮겨놓고 마는, 중늙은이의 그 시점에서.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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