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대학로에서 알아주는 중견 배우가 최근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결혼 18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가 돈을 벌어오라고 했다. 아내 역시 젊은 시절 함께 배우로 활동했고 때문에 남편의 배우 생활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응원해 줬다. 결혼과 함께 아내는 무대를 떠났고, 돈은 내가 벌 테니, 당신은 연극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멋진 아내였다. 생계는 아내가 꾸리는 대신 자신은 배우로 열심히 살아왔다.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돈은 벌지 못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아이들은 커가고, 그만큼 돈이 더 들어갔다. 아내가 하는 일로는 아이들 뒷바라지가 힘들었다. 아내는 모진 맘먹고, 남편에게 돈을 벌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다. 남편은 충격을 받았다. 돈을 벌어봤어야, 돈을 벌지.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해서 돈을 벌지? 남편은 어리둥절했고, 머리가 아파왔다. 배우 말고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지? 대리운전 하면 얼마나 벌어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선배 배우가 말했다. 대리운전도 힘들어. 내가 해 봤는데 장난 아니야. 대리보다는 택시가 낫겠다 싶어 택시운전을 했지. 옆자리에 앉은 손님이 고개를 빼고선 내 얼굴을 자꾸 쳐다보는 거야. 그러더니, 사랑과 전쟁에 나온 배우 아니에요, 하고 묻는 거야. 아닌데요, 그랬더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구만.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거야. 형편이 어려운가 보죠, 하고 묻는 거야. 아니라니까요, 하고 말했더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또 이렇게 말하는 거야. 낯 뜨거워 죽는 줄 알았네.

선배 배우도 대학로에서는 알아주는 명품 배우다. 연기는 기가 막히지만, 돈이 없다. 무대에서는 박수를 받지만, 집에서는 박대를 받는다.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여보 식사합시다, 하는 소리 한 번 하는 법이 없다. 아이들도 그런가보다, 하고 저희들 입에 밥 퍼 넣기 바쁘다. 그래, 나도 돈 좀 벌어보자, 하고 결심하고 택시운전까지 하게 된 것이다. 택시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났고, 회사에서 당신 돈으로 수리하시오, 했다. 내 잘못도 아닌데 이게 무슨 경우냐고 따졌지만, 규정이 그렇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제 돈 들여 차 수리해 주고는 때려치웠다.

늘 머리를 박박 밀고 다니는 어느 배우는 얼마 전 술집을 열었다. 자신이 직접 음식을 만들고 술도 날라 준다. 사십 넘은 지 벌써 오래고 오십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 장가도 못 갔다. 무대에 서 본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술집 주인은 따로 있다. 주인 대신 술집을 맡아 월세나 내주고 좀 남으면 나눠 먹기로 한 것이다. 얼른 돈을 벌어야, 엎어지는 바람에 왕창 빠져버린 앞니를 해 넣을 수 있다.

대학로가 문화특구로 되면서 소극장이 늘어나고 흥청이고 있지만, 배우나 연극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치솟는 건물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짐을 싸는 이들이 줄을 잇고 있다. 대학로를 떠나 극단 식구들이 함께 시골로 들어가기도 한다. 문화 난민인 셈이다. 문화를 살린다는 정책이 문화를 죽이고 있다. 무서운 역설이다. 죽 쒀서 개준다고 했다. 건물주 좋은 일만 시키고, 주인공들은 떠나고 있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그런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더불어, 말만 하지 말고, 진짜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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