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위문편지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추운 겨울이 되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어린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위문품을 보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편지에는 아이의 따뜻한 정이 묻어났다. 선생님이 시켜 하는 것이었지만 나름 진지하게 편지를 썼었다. 군인 아저씨로부터 답장을 받은 아이는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답장을 해 주면 좋겠다는 소망도 적었다.

위문품을 가져가는 것도 일이었다. 화장지나 치약 칫솔 따위를 하얀 부대에 담아 보내곤 했는데, 형편이 넉넉지 않은 아이들은 위문품 가져가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당장 집에서 쓸 치약도 변변치 않은 살림에 위문품 치약을 사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교사들은 위문품을 가져오지 않는 아이들을 혼내고 모욕을 주기도 했다. 고생하는 군인들을 위한 아름다운 선행 뒤에 감춰진 서글픈 풍경이었다.

군인들에게 편지를 받는 것이 큰 낙이었다. 요즘에야 훈련소에 들어가면 곧바로 사진을 찍어 홈페이지에 올리고, 인터넷으로 편지도 쓰는 세상이지만, 예전에는 편지 한 장도 귀했다. 군사우편이 무료라 군인들은 마음껏 편지를 쓸 수 있었지만, 편지를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편 담당 병사가 큼지막한 가방을 들고 연대에서 편지를 수령해 올 때면, 혹시 나한테 온 편지도 있을까 하고 목을 빼기도 했다.

편지를 나눠줄 때면 희비가 갈렸다. 편지를 받은 병사는 신이 났고, 편지 한 통 못 받은 병사는 풀이 죽었다. 때로는 나쁜 소식이 들어 있기도 했지만 대개는 기분 좋은 편지들이었다. 편지 중에서도 애인에게서 온 편지가 가장 반갑고, 부러움을 많이 샀다. 하급 병사를 닦달해 편지를 주고받을 애인을 소개 받기도 하고, 문장력이 좋은 병사가 대신 연애편지를 써 주기도 했다. 낯선 여자에게 편지를 동시에 보내 누가 먼저 답장을 받는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위문편지를 주고받다가 사랑이 싹트기도 했다. 여고생이나 여중생이 편지를 쓰면 답장을 하고 그렇게 정이 쌓여 나중에 부부가 되기도 했다.

입대 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오던 애인의 편지가 점점 뜸해지기 시작하면 병사의 마음도 타들어 간다. 밥맛을 잃고,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지고, 멍청하게 하늘을 보거나 한숨을 쉬기도 한다. 그렇게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동료 병사들이 “버스는 또 온다, 여자도 또 온다”고 아무리 말해 주어도 상심한 병사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펜팔을 하기도 했다. 외국 친구와 펜팔을 하기도 했지만, 잡지 속의 ‘이성 친구 원함’이라는 펜팔 코너를 보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펜팔의 편지를 기다리다 잘생긴 총각 우체부에게 홀라당 마음을 빼앗겨 결혼까지 했다는 여자도 있다. 편지는 그런 희한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이다.

도화지를 잘라 색종이를 붙이고 칫솔로 물감을 뿌려 눈 오는 장면을 그려 넣어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기도 했다. 요즘에는 손가락 몇 번 누르면 신기한 동영상 카드를 순식간에 보내기도 한다.

퀵 서비스 세상이라지만, 손으로 꼭꼭 눌러쓴 편지만큼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도 없다. 올 겨울에는 손편지를 한번 써 보면 어떨까. 크리스마스가 코앞이고, 곧 새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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