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 아직 미명인 일요일 새벽 네시. 아침잠 많은 필자에게는 한밤중이다. 몸은 무겁고 바이오리듬이 낯설다. 정신이 ‘속세’로 완전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잠시 뒤척이며 머뭇거린다. 꼭 독립운동하는 심경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양이세수를 한다. 첫 닭이 울기 전, 혹은 닭이 잠에서 깨어나 푸드득거리며 막 홰를 친 순간. 밖은 캄캄하다. 하지만 왠지 어둠이 좋다. 코끝을 스치는 아침 공기가 맑고 상쾌하다. ‘독립운동가’는 아파트주차장에서 차에 시동을 걸며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그리곤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을 문득 해본다. 성묘 때 가본 조상님 사시던 동네 뒷산은 참으로 높았다.

벌초하러 간다면 소시적엔 덜컥 겁부터 나지 않았던가. 풀베기 못지않게 산을 오르내리는 것부터 힘들었으므로. 군자금 모으러 뛰어다니셨다는 할아버지는 야음을 틈타 가끔씩 고향을 찾았다. 변변한 찬거리가 있을 리 없는 할머니는 밭에 버려진 배추 시래기를 주워 할아버지와 그 동지들을 위해 따뜻한 국을 끊였다. 흰 두루막을 입은 일행은 잠시 눈만 붙이고는 날이 밝아오기 전에 그 높은 산을 넘어 다시 어디론가로 떠났다고 한다. 그들은 없다. 그들이 이 땅에 남긴 발자취들을 지금 정확히 알 길이 없다. 한 몸 바쳐 평생 독재와 맞섰던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도 때마침 이날부터 영면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韓)민족의 한반도는 있다. 대한민국은 있다.

# 광명역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KTX역사를 향해 걸어갈 때마다 생각이 난다. 필자는 미리 예매해 놓고 열차를 타지 못해 어이없이 차비를 몽땅 날려버린 적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부산 내려갈 때마다 사전에 기차표 예매를 하지 않는다. 빈 좌석이 많은 새벽 다섯시 출발 KTX 첫 열차를 탄다. 첫 열차를 놓치면 다음 열차를 탄다. 다음 여섯시 일곱시 출발 부산행 KTX를 타도 된다. 역방향 빈 좌석이 많이 있다. KTX를 자주 이용하다보니 필자는 코레일에 불만이 좀 있다. 예매한 열차를 놓치면 코레일은 그 열차를 타지 못한 데 따른 환불 수수료(?)를 공제한다. 그렇게 하지 말자. 즉 그 다음 출발 열차 중 빈 좌석이 있는 열차를 페널티 없이 승객이 타게 해주면 좋겠다. 환불을 원할 땐 전액 다 환불해주면 좋겠다.

너무 긴 시간, 긴 시일이 지난 후는 몰라도 당일 정도는 고객에게 다 환불해주라. 그렇게 한다고 코레일 측에 손해가 별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경우의 수는 두 가지. 당초 승객이 놓친 열차에 빈 좌석이 있다면 코레일 측은 다른 고객들에게 다른 좌석표를 팔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객으로 인한) 손해가 없다. 또한 그 열차가 만일 좌석을 가득 채운 만원 열차라면 열차승무원이 정산한 뒤 입석 승객에게 좌석을 안내하라. 좌석표가 없어 마지못해 입석표를 구입한 승객에게 대신 주면 된다. 만원 열차는 늘 차칸 사이 복도에 쪼그려앉아 있는 입석 승객들이 빈 좌석 나오기를 기다린다. 입석표도 열차마다 정해진 숫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엄밀히 따질 때 코레일에 손해가 약간 발생한다. 그러나 그 정도의 손해는 코레일이 감수할 수 없는가? 그 정도는 대국민서비스차원에서, 또한 코레일 단골 이용 회원고객을 위해선 좀 양보해주면 안 되는가?

# 부산역 택시 승강장에 도착하자 전에 없던 승차 안내인이 있어 반갑다. 유니폼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코레일 직원이 택시 승차를 안내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는 잘 하는 서비스다. 노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역 광장엔 마른 가랑잎이 나뒹군다. 입동 지나 초겨울인 지금과 달리 초록이 싱그러운 7개월 전이었다. 척추가 휘어지고 협착증에 디스크까지 악화될 대로 악화돼 몸이 마비된 채 병원에 실려간 어머니(85)였다. 꽃피는 봄 4월에 척추 수술을 받았다. 그때는 병원 뒷산 화려한 봄날의 정취가 가득해 서러웠다.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는데 환자의 회복 속도는 더디기 짝이 없다. 어머니는 아직도 재활병원에 입원해 있다.

“어서오십시오. 반갑습니다.” 택시를 타고 앉아 대연동 식물원까지, 그리고 유엔기념공원 정문 앞에 있는 한 재활병원에 간다고 행선지를 밝혔다. 택시기사가 목적지를 잘 알고 있다는 표시를 내며 반문한다. “P재활병원이죠?” “어떻게 아시나요?” “제 처(妻)가 무릎을 수술 받고 그 병원에 한 달 입원해 재활치료를 받았어요.” “네~ 제 어머님도 입원해 계신데 직원들이 친절하고 보행연습하는 재활 프로그램이 좋은 편이라 다행입니다.” “다른 곳보다 전문재활병원이 비교적 잘 돼 있는 곳이 부산입니다. 부산은 물가도 비교적 싸고 살기 좋은 편이죠.”

대화에 거침이 없다. 친절하고 소탈한 분위기다. 부산역과 택시는 부산 방문자에 대한 첫 인상을 결정한다. 이 정도면 이 택시 기사는 거의 부산시의 훌륭한 홍보대사격인 셈이다. 이 때 필자가 고개를 돌려보고는 놀랐다. 핸들을 잡은 기사님을 자세히 보니 백발의 노신사다. 연세를 물어보니 76세. 조기 축구로 다져진 탄탄한 몸이란다. “전 평안북도가 고향인데 1.4후퇴 때 엄마 손 잡고 월남했지요. 사실 주위엔 80대 선배 기사님도 여럿 있는데 하나같이 건강하십니다.” “아, 그런가요?” 흐뭇한 미소가 필자의 얼굴에 절로 번진다. 피부로 직접 체감할 수 있는 건강 백세 시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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