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군부대에 배치되자마자 혹한기 훈련으로 시작한 80년대 군대 생활이 떠오른다. 필자의 부대는 툰드라였고, 병(兵)과 부사관이 아군 적군처럼 둘로 나뉘어 으르렁거리는 내무반 사기는 늘 빙점 이하였다. 꽁꽁 언 땅에 삽질을 하고 짚과 들풀을 깔아 겨우 만든 야산의 비트는 군화 속의 발을 냉동실처럼 얼어붙게 했다. 몇 겹을 껴입고 팔짱을 낀 채 웅크려 있어도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웅웅거리며 밤새 위협하는 칼바람이 어찌 그리 원망스럽든지. 그리곤 집합. 욕설. 그리고 구타. 잠시 잠들었다 싶었는데 누군가 깨우면 즉각 기상해야 한다. 천근같이 무거운 몸으로 경계 근무를 나간다. 누군가 교대를 해줘야 쉴 텐데 다음 근무 순번인 고참은 곯아떨어져 끝내 보초를 서러 나오지 않는다. 얼음덩어리를 주워 식판을 닦는 둥 마는 둥 하다 또 산악행군, 행군…….

“어디서 복무하고 있나요?” “경기도에 있는 **사단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예비군 교육하고 관리하는 부대인가 보네요. 힘들진 않나요?” “예. 힘들지 않습니다. 편합니다.” “부모님께도 지금처럼 말씀드렸겠군요. 부모님도 안심하셨을 것입니다. 휴가 마치고 자대로 복귀하는 아들의 당당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했겠네요.”

뉴밀레니엄 현역군인의 씩씩하면서도 예의바른 목소리와 표정이 든든하면서도 정겨웠다. 지난달 말 부산역에서 잠시 대화를 나눈 한 젊은이에게 필자는 손을 내밀었다. 검게 탄 얼굴에 얼룩무늬 군복이 잘 어울리는 부산사나이였다. 그와 필자는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과거 군대와 요즘 군대, 많이 다르긴 다른 것 같다. 그러나 엄격한 단체생활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추운 날씨 속에 각종 훈련이 펼쳐질 것이다. 긴장된 경계 근무에, 위계질서 엄격한 내무반생활은 물론이고. 입대 전 자유로웠던 생활에 비해 힘들게 느껴지지 않을 군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애써 ‘편하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멋있다 못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최근 각종 사고와 방산비리 등으로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던 군.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군을 기피하는 현상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남자라면 현역으로 군대생활을 하고 떳떳이 사회에 복귀해야 한다는 건전한 인식도 사회전반에 확산돼 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기만 하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이 최근 고교 중퇴자나 중학교 졸업자도 현역 복무를 원하는 경우 현역병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 병역법 개정안을 내놨다. 개정안은 의무교육을 마쳤는데도 학력차별을 하는 것은 위헌소지가 있다는 의견이 반영돼 발의됐다. 유 의원은 “중졸자, 고퇴자들 중 현역을 가고 싶어하는 경우도 많다”며 “교육기본법에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총 9년만 의무교육이고, 개인마다 사정이 있을 수 있는데 학력 기준으로 보충역으로 분류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밝혔다.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강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 의원 말처럼 신체 건강한 이는 다 입대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유 의원이 이 같은 목소리를 내기 전 부산의 한 여성에게서 이와 맥락이 닿는 얘기를 우연히 들은 바 있다. 그는 승객인 필자를 부산역 광장에서 태우고 목적지까지 이동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여성 택시기사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거나 중졸학력자는 가뜩이나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반인들 때문에 사회적응이 어렵다”며 “어린 나이에 한순간에 낙오자가 되는 것을 막고 우리 사회를 보다 건강하고 에너지가 충만한 분위기로 만들려면 그들의 현역병 입영을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 예외랄 것 없이 빠짐없이 다 군복무를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아들만 셋 낳아 키워온 그녀였다. 아들들이 건장하고 남자다운 성인이 되기 위해 꼭 현역병으로 군복무를 했으면 하는 바람을 엄마는 갖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좀 더 잘 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현역으로 군복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큰 아들 체중이 그만 100킬로그램을 넘겨 군 입대를 못하고 있어 아쉽다고 말했다. 몸이 무거워도 잘 걷고 잘 뛸 수만 있다면 입대를 허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대화 끝에 함께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부산 가는 길은 유쾌했다. 부산서 오는 길도 동행이 있어 심심치 않았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 ‘지하철 시’가 내걸린 어느 시인의 투박하면서도 따스한 시어들을 음미해보며.

“다듬이질 소리에 설은 오고 있었다/ 광목이불 홑청은 반질반질 윤이 났고/ 등잔불 아래서 어머니는 칠남매의 설빔을 지으셨다/ 명절을 수십년 치르고도 끄떡없었는데/ 지금은 달팽이처럼 돌돌 말린 채 누워 있다/ 입에서는 휘파람소리가 나고/ 구멍 숭숭 난 뼈마디에 바람이 들락거린다/ 자식들 한 해라도 더 보고파/ 머무르고 싶은 애틋한 갈망/ 다녀가지 못한 자식걱정 놓지 못하는/ 눈빛 위로 석양이 내려앉는다/ 이제는 가위질 소리 멈추고/ 다듬이질 소리도 잠들었다. (‘엄마의 명절’ 이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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