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붕어빵에 붕어가 없고, 원효굴에 원효가 없다(?).”

주말에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과 자재암을 들렀다. 모처럼 힐링을 겸해 붉은 단풍과 국화 축제를 보며 가을 정취를 즐겨보자는 생각이었다. 가뭄 탓으로 단풍은 아직 절정을 이루지 않았다. 하지만 노란 단풍잎이 땅에 떨어져 겹겹이 쌓인 소요산의 추색은 아름다웠다. ‘이 길이 요석공주와 설총이 걸어 다니던 길이려니, 대사의 거처는 위쪽 자재암이었고, 아들과 함께 수행을 하던 곳이 이곳쯤이려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산길을 오르는데 새로 단장하고 있는 석굴이 눈에 띈다.

그런데 아직 조성중이라서 그런지 회색 시멘트로 공사를 하고 있어 눈에 거슬린다. 유리벽이나 울타리로 참배객들의 물리적 접근을 차단하고 문화재를 보존·유지하려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일까. 화강암으로 입혀 잘 보수하면 원래의 수행처 비슷하게 유지될까. 어떻게 조성하려는지 궁금해 자재암 측에 문의해보았다. 종무소에 따르면 많은 무속인들이 찾아와 촛불을 켜놓아 늘 화재 위험이 있는 곳이다. 또한 관광객들이 무시로 드나들며 오염되고 훼손돼 붕괴일로에 있어 새로 석굴 조성 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단견인지 모르나 보수를 하더라도 원래 불상이 없었으니 불상과 불전함은 새로 설치하지 않았으면. 원래의 모습이 최대한 유지되도록 배려해주었으면. 훼손된 채 방치된 문화유산이라면 석굴을 성역화하되, 인공적인 손길을 최소화해 원래 모습 그대로 소박하게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줬으면. 가까운 곳에 원효기념관이라도 건립해 스님의 고귀한 정신과 생애를 알릴 수 있도록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원효대사는 노장(老莊) 사상에도 정통했다. 대사가 주석한 소요산의 ‘소요(逍遙)’는 장자 소요유편에 나오는 말이다. 자재암의 자재(自在)라는 단어도 무애자재한 대승적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사의 말씀을 음미해본다. “본디 부처님의 도는 깊고 넉넉하고 그윽해 틈이 없는 무간 세계에서도 현묘하고 크며 광원하니 가이없는 세계보다 원대하다. 유위와 무위가 모두 환화와 같아 둘이 아니고 무생과 무상이 안팎을 다 포괄해 그것을 다 없애준다. 두 가지 얽힘에서 벗어나 속박에서 모두 해방되게 해준다. 이로써 능히 삼세에 노닐어서 평등하게 세상을 보며 시방세계에 모두 현신하며 법계에 두루 돌며 만물을 구제하고 미래가 다하도록 새로워진다.”

산행 전날, 필자는 소풍을 앞둔 학생처럼 설레는 하룻밤을 보냈다. 가슴이 뛰었다. 학창시절부터 나름 관심을 가졌던 원효를 다시 만날 생각 때문이었다. 책장을 살피다 먼지 묻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책 이름은 ‘원효의 대승철학’. 이는 동서양 철학을 넘나들며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는 강의로 유명한 비교철학자 김형효 교수의 원효 해설서이다. 원효스님의 금강삼매경론이나 대승기신론은 난해하기 짝이 없지만 김 교수는 원효 사상을 마음의 혁명이란 말로 해석한다. 마음의 욕망을 소유론적인 것에서 존재론적인 사유로 옮겨 대승적인 자세로 세상을 보고 인생을 음미해보라는 말이 머리에 쏙 들어온다. 여기에 당시의 시대정신이 성속일여(聖俗一如)를 바탕으로 일반 백성들을 대승(大乘)의 차원으로 통합하기 위해 지도층이 솔선수범해 사심 없고 공적인 것을 우선시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었다는 해설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왜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덤을 바다 속에 처리하라고 유언한 문무왕도 결국엔 대승정신이 아니었겠는가.

원효대사는 617년에 태어나 686년에 입적했다. 화랑도 수련을 가르친 원광법사와 승려가 되기 위한 구족계를 준 자장율사 등 호국불교를 실천한 고승들로부터 큰 정신적 영향을 받은 제자였다. 대사는 70년간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등의 시대를 살다갔다. 이때는 생과 사를 가르는 치열한 전쟁이 삼국 간에 벌어진 살벌한 시기였다. 고구려를 공격하던 김유신 장군이 대사의 자문을 받기도 했다. 이는 대사가 당시 신라군과 그리 멀리 떨어져 지내지 않았음과 당시 신라의 고승도 백성의 안위 등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반도가 바야흐로 거센 외교적 격랑에 휩싸여 있다. 남북분단과 대결구도 또한 계속 고착화돼 가고 있다. 국내적으로도 정치권은 교과서 국정화 논란 등으로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런 점에서 원효 사상이야말로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대사는 아들 설총, 요석공주 등 가족과 함께 가정생활을 계속하면서 출가승 못지않게 6바라밀 대승 불교 수행을 계속했다. 대사가 전국 각지를 돌며 나무아미타불이나 광명진언만 외워도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쉬운 가르침을 전했던 것도 무애자재한 가운데 대승적 삶을 실천한 것일 터. 소요산 중턱에 걸터앉아 있는 필자에게 김 교수 책의 맨 마지막 문장이 또 하나의 깨우침으로 다가온다. “역사가 융성할 때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고, 망할 때도 반드시 그 까닭이 있다. 나는 그것을 신라 융성기에 대승정신을 생활화한 신라 지도층의 무사지공(無私至公)한 정신에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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