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박영수 북측 대표), “아니, 지금…”(송영대 남측 대표),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나기 어려울 게요.”(박 대표),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이에 대해 우리가 가만있을 것 같아요?”(송 대표), “글쎄, 여기에 대해서 심사숙고를 해야 한다…”(박 대표), “아니, 지금 전쟁선언하는 겁니까?”(송 대표), “그쪽에서 전쟁선언을 했다는 거예요. 말을 왜 듣지 않고… 졸고 있어?”(박 대표)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3월.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남북 특사교환 실무회담이 열렸던 날을 필자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북측 대표단의 난데없는 ‘서울 불바다’ 발언이 회담장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회담을 기자단 대표로 취재한 이른바 ‘프레스 풀(press pool) 기자’였다. 이날 오전 양측 대표의 모두 발언 등 회담장 분위기에 대한 일차 기사 송고를 마치고 프레스룸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필자였다. 노동신문 편집국장 등 북측 관계자들과 담소를 나누며 추가취재를 벌이고 있는데 박영수 대표가 송영대 대표에게 한 위협발언의 내용이 전해졌다. 갑작스런 폭탄 발언과 함께 회의는 소란 속에 서로 고성과 삿대질을 주고받다 끝났다. 필자는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뛰어 남측 지역 자유의 집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서둘러 기사를 송고해야 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상황에서 필자가 긴급작성한 ‘서울 불바다’ 발언 기사는 팩스로 남북회담 사무국에 전달됐고 줄서서 기다리고 있던 내외신기자들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주요 뉴스로 타전했다.

남북한은 체제 차이가 크다. 북한은 늘 불확실성이 상존한다. 남한은 보혁 대립과 정파 간 의견차, 선거일정 등 내부사정에 따른 변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남북관계는 늘 온탕 냉탕을 반복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과 함께 북한 김일성 주석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나갔다. 하지만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을 하면서 1차 북핵 위기가 촉발됐고, 이듬해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남북한은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로 들어갔다. 북한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했고, 미국은 항공모함 5척을 동해로 보내 핵시설 공습 준비를 하는 등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 이때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 와 김 대통령에게 김 주석의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전달해 극도의 긴장상태에 빠진 남북관계를 전환시켰다. 하지만 잘 풀려나갈 것 같았던 남북관계는 다시 냉각되고 만다. 1994년 7월 김 주석이 갑자기 사망했고 1996년에는 강릉 무장공비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다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햇볕정책과 함께 해빙이 돼 남북정상회담도 이뤄졌지만 북한은 ‘핵·경제 병진노선’을 고수하며 핵개발을 지속했다. 이어 이명박 정부에선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사건과 천안함 폭침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올 여름 남북한은 지뢰도발과 포격도발사건으로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한 대치를 벌이다 8.25합의로 위기 상황을 봉합하기에 이르렀다. 남북관계개선에 관한 큰 기대 속에 지난주 개성에서 남북차관급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회담은 전반적인 남북관계개선 의제는 물론,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관광 재개에 관해서도 전혀 진전된 발걸음을 보이지 못하고 결렬되고 말았다.

결렬의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앞으로 얼마든지 전환될 수 있다고 본다. 남북한이 마음만 먹으면 정치·경제·군사적인 면에서 서로 윈윈(win-win)할 게 너무도 많다. 최근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국의 급부상 때문이다. 곧 있을 남북정상의 신년사에 긍정적인 내용이 담길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양 정상의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에 관한 의지와 역사인식이라고 본다. 역사 앞에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 혹은 분단 조국의 영령들 앞에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느냐 등이 아니겠는가. 남북한 양 정상 앞에 과연 남북통일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하게 다가올 수 있는 어젠다인지가 궁금해진다.

‘서울 불바다’ 발언 이후 21년 만에 개최된 차관급회담이었다. 남측 수석대표 황부기 통일부 차관은 1994년 회담 당시 남측 대표 송영대 통일부 차관의 비서관으로 차관실에서 근무했다. 사무관 시절의 황 차관은 필자와 사석에서 대화를 나눌 때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잘 풀리지 않는 남북관계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통일부 직원이야 다 그렇겠지만 그도 행정고시 합격 후 내로라하는 노른자위 인기부처들을 제쳐놓고 평소 소신에 따라 통일부를 택했다. (필자에게 한 번도 드러내놓고 말한 적은 없었으나) 통일의 튼튼한 초석을 까는 일에 생애를 건 듯한 그다. 당시 그가 지적했던 북한의 불가예측성과 우리 측의 유연성 부족이라는 남북관계 경색의 이유는 아직도 여전하다. 그때처럼 남북관계는 지금도 온탕 냉탕이다. 하지만 희망섞인 바람으로 손꼽아본다. 후배 언론인들이 남북회담을 취재하다 헉헉거리며 뛰어 전 세계적인 특보를 온 지구촌에 전할 날이 언제일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 기사 말이다. ‘남북정상회담 합의’→‘서울 평양 대사급 연락사무소 설치’→‘남북연합 합의’→‘남북평화통일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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