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독도노래 겨우 3곡 찾아

‘독도는 우리땅’ 개념있는 韓

논문 발판삼아 공연 나설 것

1일 오후 서울 천지일보 본사에서 ‘독도노래’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독도가수 서희가 인터뷰 중 발언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4.03.05.
1일 오후 서울 천지일보 본사에서 ‘독도노래’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독도가수 서희가 인터뷰 중 발언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4.03.05.

[천지일보=이솜 기자] “‘우리나라 국민이 독도를 사랑하는구나, 독도는 우리 땅이 맞구나’를 마음 깊이 느끼게 한 연구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독도 노래를 만들어 부른 자체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아주 중요한, 실효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죠.”

세계에 독도를 노래로 알려 ‘독도 가수’로 불리는 서희(본명 서선택, 사진)씨가 국내 최초 ‘독도 노래’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수여식 이후 약 보름이 지난 3.1절에 천지일보 본사에서 만난 서씨는 논문을 완성하기 위한 우여곡절과 이후의 본인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서씨는 지난 2014년 경북 경산시 경일대 대학원 박사과정(지적학 전공)에 입학했으며 ‘대한민국 독도노래 50년사 연구’로 학위를 취득했다.

‘대한민국 독도노래 50년사 연구’ 논문을 들고 선 독도가수 서희. ⓒ천지일보 (제공: 서희)
‘대한민국 독도노래 50년사 연구’ 논문을 들고 선 독도가수 서희. ⓒ천지일보 (제공: 서희)

◆첫 독도노래 작사가까지 찾아 인터뷰

서씨 논문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독도노래’는 1967년에 나온 ‘독도의 섬지기(신지현 노래, 김문응 작사, 정주희 작곡)’다.

1982년 발표돼 국민에게 익숙한 ‘독도는 우리땅(박인호 작사 작곡, 정광태 노래)’이 최초의 독도노래는 아니었던 것이다.

서씨는 ‘독도의 섬지기’ 작곡가 정주희씨 인터뷰 결과 독도에 어민 숙소를 짓고 정착한 최초 주민 최종덕을 생각하며 제작한 노래라고 밝혔다. 서씨가 어떻게 이런 가사를 썼냐고 물으니 정씨는 “친구와 술을 기울이는 도중 독도라는 섬 얘기를 들었다. 무인도인데 거기서 사람이 혼자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외롭겠다라는 생각에 작곡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고 한다.

또 1965년 4월 22일 한일 간 어업회의에서 어업협정의 대강이 타결되고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일본 중학교 지도책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기하기 시작하자 우리 국민이 일본의 독도 침탈야욕을 인지하기 시작한 배경도 있다고 서씨는 설명했다.

1967년부터 2022년 5월까지 등록된 우리나라 50년간의 순수 창작 독도노래는 총 193곡이었다. 지적학적인 내용상으로 분류하면 ‘권리적 주장’ 측면의 노래가 118곡(61.1%)으로 가장 많았으며 물리적 측면의 노래가 70곡(36.3%)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용규제적인 측면의 내용도 5곡(2.6%)으로 나타났다.

독도노래 시대별 특성으로는 초기에는 오락적 기능으로 출발했으나 중·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애국적 기능의 노래가 강세를 보였다. 교육적 기능의 노래는 중·후기에 들어서서 등장했으나 곡의 수는 적었다.

형식별 특성으로는 우리나라 영토로서 독도의 물리적 측면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독도는 국민이 지킨다는 메시지와 희망을 전달하는 대중가요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연하는 독도가수 서희. ⓒ천지일보 (제공: 서희)
공연하는 독도가수 서희. ⓒ천지일보 (제공: 서희)

◆노래 수백곡 일일이 듣고 가사 대조

서씨가 독도노래를 논문 연구 주제로 삼은 데에는 담당 교수의 추천이 있었다. 세계에서 독도를 노래로 홍보하는 서씨에게 독도노래의 역사를 찾아보라고 했다는 것.

서씨가 막상 조사를 시작하니 독도노래에 대한 역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씨는 “인터넷으로 대략만 찾아봐도 (독도노래가) 수백곡이 돼 보이는데 정보가 부정확하고 정리된 자료가 전혀 없었다”고 회고했다.

서씨의 고생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정씨 등 오래된 독도노래의 작사·작곡가들을 찾아 인터뷰하기 위해 저작권협회를 비롯해 이곳저곳 수소문하고 LP판으로 된 노래의 음원과 온라인상에 있는 가사 등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자료에 정확성을 더했다. 서씨는 선행 논문이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더 어려움이 컸다고 말했다.

논문이 탄생하기에 10년이나 걸린 이유도 있었다. 처음 논문을 작성하고 발표하려고 할 때 “노래 연구를 어떻게 지적학과에서 발표하냐”는 뒷말이 나와 학과를 바꾸려는 등 문제가 생겨 발표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후 강화도 선원사 스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스님이 자신을 후원해주겠다며 논문을 완성하라고 힘을 더해줬다. 서씨는 “생각을 해보니 내가 그간 독도가수라고 공연해왔는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게 자존심 상하더라”며 “결국 후원은 받지 않았지만 어떤 동기부여가 돼서 다시 논문 작성에 돌입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논문 발표 후 서씨 주위에서는 “(서씨 논문이) 역사적 사료다” “최초의 독도노래가 발견됐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등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졌다고 한다.

논문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서씨는 일본에서 같은 기간 창작된 독도노래도 조사했다. 총 3곡이 확인됐는데 2곡은 경음악이었고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노래는 1곡뿐이라고 서씨는 말했다.

서씨는 “우리는 국민 모두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데 일본에는 아직 그런 개념이 우리처럼 강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자료”라며 “일본에도 독도를 연구하고 자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국민화가 안 돼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씨의 이름으로 등록된 독도노래만 10곡이다. 어떤 작곡가는 독도노래만 5곡을 짓고 어떤 가수는 몇 곡이나 독도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서씨는 “이런 사실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겠느냐”라며 “독도를 진짜 사랑하니까, 우리 땅이라는 걸 아니까 이걸 노래로 만들고 부르고 싶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도가수 서희. ⓒ천지일보 (제공: 서희)
독도가수 서희. ⓒ천지일보 (제공: 서희)

◆“박사과정 마쳤지만 난 여전히 가수”

1990년부터 ‘역사 노래 부르기 대회’를 진행하다가 역사 노래의 긍정적 특성을 알게 된 서씨는 이후 우리나라 역사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씨는 “노래는 공부가 되고 개개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점점 영토수호를 노래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예명도 자신의 32대 할아버지로 고려시대 거란족으로부터 강동육주를 되찾아온 ‘천재 외교관’ 서희 장군으로 바꿨다.

이후 서씨는 자신의 독도노래를 영어, 일본어, 스페인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세계에 홍보하고 있다.

이번 논문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긴 하지만 서씨는 “내 본질은 가수”라고 힘줘 말했다.

“박사가 됐으니 근엄해져야 한다는 지적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가수고, 노래로 독도를 알리고 싶습니다. 논문이 우리나라 최초라는 긍지는 느끼지만 저는 가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제 독도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됐으니 노래도 더 잘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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