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에 자리한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동원상하릉(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이다. 세종(英陵)과 추존 진종(永陵)의 능호도 영릉이다.

1659(효종 10)년 5월 4일 효종이 즉위 10년 만에 승하하니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묻혔다. 그러나 빗물이 스며든다하여 1673(현종 14)년 여주의 세종 영릉 동쪽에 자리를 마련해 옮기고자 능을 열어보니 침수 흔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천장을 했다.

다음해 인선왕후가 승하해 효종 왕릉 아래에 자리하니 조선왕릉 최초의 동원상하릉이 됐다. 효종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의 요구로 형 소현 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갔다. 8년 후 청에서 돌아온 형이 두달만에 돌연 사망하니 세자의 자리를이었고 얼마 후 인조의 승하로 왕위에 올랐다. 청의 사정을 잘 아는 효종은 북벌의 꿈을 키우며 군사력을 강화했으나 나이 42세에 돌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후 조정에서는 ‘북벌’이 실종되고 말았다. 효종은 지하에서 못다 이룬 북벌의 꿈을 꾸고 있을까.  

◆형 소현세자 죽음, 효종 인생 바꿔

효종(이호)은 1619년 인조와 정비 인열왕후 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는 4명으로 위로 소현세자, 아래로는 인평대군과 용성대군이 있었다. 1626(인조 4)년 7살에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1년 우의 정장유(덕수장씨)와 안동 김씨의  딸(훗날 인선왕후)과 결혼했다. 각각 12살과 13살이었다. 효종의 비 인선왕후 장씨는 결혼해 풍안부부인에 봉해졌는데 아버지 장유는 문필가로 명성이 있었고 어머니는 부친이 우의정 김상용이었다. 왕후는 7명(1남 6녀)을 낳아 1대 태조 신 의왕후(6남 2녀), 2대 태종 원경왕후(4남 4녀), 4대 소헌왕후(8남 2녀)에 이어 4번째로 많은 자식을 뒀다. 아들은 휘(훗날 현종)이다.

‘영릉 전경.’ 효종의 영릉은 조선 최초로 왕과 왕후의 능이 좌우가 아닌 상하로 놓여진 동원상하릉이다. 이는 영릉과 의릉(경종과 선의 왕후) 2기 뿐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영릉 전경.’ 효종의 영릉은 조선 최초로 왕과 왕후의 능이 좌우가 아닌 상하로 놓여진 동원상하릉이다. 이는 영릉과 의릉(경종과 선의 왕후) 2기 뿐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봉림대군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신했으며 1637년 1월 22일 청군과 대치했는데 실록은 “봉림 대군이 용사를 모집하여 출격하였으나 대적하지 못한 채 더러는 죽기도 하고 더러는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고 했다. 봉림대군이 적군과 만나 화친한 사실을 알리고 협의해 강화에서 돌아오게 됐다. 조선이 항복하니 이듬해 1637년 형 소현세자, 동생 인평대군과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있었다. 인평대군은 1년 후 돌아왔다. 8년이 지나 1645년 1월 26일 청나라는 “이미 중원을 차지하여 천하 통일이 될 것이니 조선을 의심할 일이 없다. 소현세자는 아주 돌려보냈으니, 대군도 돌아갈 것을 허락한다”고 했다. 형 소현세자는 2월에 돌아왔다. 그러나 두달여 만에 앓더니 갑자기 죽고 말았다.

봉림대군이 5월에 돌아오니 세자 자리가 주어졌다. 원래는 원손(소현세자의 아들)으로 정해야 하나 인조는 그리하지 않았다. 1645년 윤6월 2일 인조가 영의정과 판서를 포함한 16명의 대신을 불러 후사를 논했다. “나의 오랜병이 이따금 심해지고 원손은 미약하니, 형세를 보건대 기다릴 수가 없다”하면서 “어린 임금은 국사를 담당할 수 없을 듯 하니 대군들 가운데서 세우고자 한다”고 하니 모두 원손이 돼야 한다고 했고 유독 김자점은 임금 뜻대로 해야 한다 했다. 인조가 반대 의견에 매우 화를 내니 결국 봉림대군으로 정해졌다. 이에 봉림대군은 울면서 두 번의 반대상소를 올렸으나 인조는 “세자가 되어 동생의 역할을 다하고 조카들을 자식처럼 대하라”며 강행했다.

형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소통하고 배우려하니 인조와 반청 대신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반면 봉림대군은 조선에 굴욕을 안겨준 청나라에 대한 반감과 친명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저런 연유로 1645년 9월 27일 봉림대군은 세자에 책봉됐고 이듬해 형수 폐세자빈 강씨와 1648년 두 조카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듬해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했다. 효종은 1650년 유배 중인 형의 막내아들 3남 이희를 강화를 거쳐 교동도로 옮기고 1656년 풀어 줬다. 1659년 경안군에 책봉했고 재위 내내 조카를 보살폈다.

효종릉(왼쪽)과 인선왕후의 능침. 왕의 능침에는 곡장이 있다. 동일능역이므로 왕과 왕후의 봉분 사이에 담이 없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효종릉(왼쪽)과 인선왕후의 능침. 왕의 능침에는 곡장이 있다. 동일능역이므로 왕과 왕후의 봉분 사이에 담이 없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북벌위한 효종의 꿈, 군사력 강화해

1649년 왕에 즉위할 당시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조선은 청에서 서양 역법을 배워오고 사용했으며 청의 화폐도 수입해 시험적으로 유통했다. 내부적으로는 인조 말년부터 세력을 떨치던 공서파의 김자점을 파직시키고 청서파를 등용했다. 볼모 생활 중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있었는 데 즉위 후 북벌 계획을 수립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북벌정책을 지지한 박서, 원두표 등을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무장 이완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했다. 한때 유배 중이던 김자점이 청나라에 북벌 정책을 밀고해 고초를 겪었으나 이를 무마하고 군비의 확충과 군제의 개편, 무관 우대정책을 펼쳤고,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1654년 한강변에서 1만 3천명의 병사가 관병식을 거행했다. 이때 제주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과 그의 일행이 제조한 서양식 무기를 시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더욱 강해져 북벌 기회를 얻지 못했다.

두 차례의 나선정벌이 있었는데 1차는 1654년 러시아·청나라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요청으로 150여명을 보내 러시아 정벌에 참여했다. 2차는 1658년에 200여명을 보냈고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효종 8년째 그의 북벌정책은 군비확장으로 백성의 생활고가 더하게 된다며 반대하자 동력을 상실했다. 송시열, 송준길 등을 중용해 사대부의 지지로 북벌정책을 추진코자 했지만 이들은 그다지 의지가 없었으며 나중에 효종이 승하하니 조정에서 북벌 주장은 사라졌다.

영릉재실. 영릉재실은 조선왕릉의 기본적인 형태가 남아 있고 다른 왕릉의 재실보다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보물(제1532호)로 지정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영릉재실. 영릉재실은 조선왕릉의 기본적인 형태가 남아 있고 다른 왕릉의 재실보다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보물(제1532호)로 지정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왕이 된 효종, 붕당을 걱정하다

1656(효종 7)년 3월 8일 왕이 주강에서 이르기를 “당목(파벌이 갈라짐)이 처음에는 갑과 을만 있어 한편 이 나랏일을 담당해도 마음을 합쳐 일을 했는데 지금은 한편도 서넛으로 나뉘고 분열되어 어찌 이런 조정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조정의 분파는 북벌정책에 대한 즉 명과 청의 관계에 따른 입장차이와 더불어 공납제의 폐단으로 백성들이 어려우지니 대동법의 실시를 두고도 갈라졌다.

1656년 3월 흉년이 심하니 나라가 흉흉했고 임금은 매일 대책을 논했다. 세금과 노역을 감하자는 주장이 끊임 없었다. 우의정 김육의 주장으로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했고 이에 찬반이 갈리며 정파의 갈등이 심해졌다. 집권세력 서인은 경화사족(서울 중심 세력)의 한당(漢黨)과 연산과 회덕 등 지방서원 중심의 산당(山黨)으로 갈라졌다. 당시 산당은 대동법을 반대했던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이 주도했다. 효종은 한당의 편에 섰으나 1656년 한당의 영수 김집이 죽고 송시열이 영수가 됐다. 송시열, 송준길 등 산당은 출사를 거부하며 효종을 압박했다. 1658년 한당의 김육이 죽으니 정국은 산당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효종이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영릉재실 회양목. 재실 회양목은 일반적인 회양목보다 보기 드물게 크고 오래돼 천연기념물(제495호)로 지정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영릉재실 회양목. 재실 회양목은 일반적인 회양목보다 보기 드물게 크고 오래돼 천연기념물(제495호)로 지정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즉위 10년 만에 세상 떠

효종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이든 백성에게도 효심을 가지고 대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지27년 되던 해 1649년 5월 8일 창덕궁 정침에서 승하했다. 효종이 5일후 즉위하니 30세였다. 실록은 “지난 4년 동안 인조와 세자 사이에 화기가 넘쳤다. 인조가 위독하니 세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였다”고 했다.

영릉비각. 표석의 앞면에 ‘조선국 효종대왕 영릉’이라고 적혀있다. 왕후는 생략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영릉비각. 표석의 앞면에 ‘조선국 효종대왕 영릉’이라고 적혀있다. 왕후는 생략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또한 “철따라 나는 과일을 처음 보면 먼저 부모께 바친 뒤에 맛보았으니 ‘우리집의 효자(孝子)이다’라는 칭찬을 들었다. 새벽이면 번번이 먼저 일어나 문안하고 좌우에서 모셨다”고 했다. 효종은 왕이 되어 백성을 아꼈다. 효종의 행장에 기록되기를 “나이 80세가 된 노인은 남녀 귀천 없이 매년안부를 묻고 쌀과 술 등을 넉넉히 지급했고 90세와 1백세가 되면 제수하고 명주와 솜을 더주고 호역을 면제시켰다. 서울에 1백세가 넘은 백성은 업어다 궁전에 모셔 진수성찬을 올리고 철따라 생산되는 물건도 계속 보내주었다”고 했다. 효종은 잔치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나의 백성들의 부모로서 늙어 잘 봉양 받지 못하니 나의 책임이다. 쌀·반찬·술을 하사하여 나의 추기급인(推己及人)의 뜻을 몸받게 하라”고 했다. 사람들이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왕의 숲길. 세종 영릉에서 효종 영릉을 잇는 소나무숲길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왕의 숲길. 세종 영릉에서 효종 영릉을 잇는 소나무숲길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효종은 남에게 인정이 많았지만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1659(효종 10)년 4월 27일 임금의 머리에 작은 종기가 있으므로 약방이 진찰하고 약을 올렸다. 그때 왕세자도 병이 중했으니 효종은 자신에 마음 쓰지 않았다. 그리고 흉년이라 밤새 비를 빌다가 종기가 위태롭게 됐고 다음날 종기의 독이 얼굴에 퍼져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날부터 여러 날 약을 올리고 수차례 침을 맞았다. 3일 위독해 편전에 나가지 못했고 4일에는 침을 맞고 피가 나왔으나 멈추지 않으니 결국 오전 10시즈음 승하하고 말았다. 41세로 11년을 재위했다. 묘호는 효종(孝宗)으로 했다. 백행의 근원인 효를 시종 달리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능호는 익릉으로 했다가 다시 ‘안녕(安寧)’하다는 의미로 영릉(寧陵)으로 고쳐 정했다.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조성했다. 1674년 2월 인선왕후가 56세로 세상을 뜨니 효종의 영릉 바로 아래에 동원상하릉으로 조성했다.

효종 어필이다. 효종이 세자 때인 17세기 중엽 경 쓴 칠언시의 필적이다. “세상의 뜬 이름 헛되도다”로 시작하며 “집 뒤의 작은 샘가에서 적다”고 되어 있다. 2010년 지정된 보물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 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효종 어필이다. 효종이 세자 때인 17세기 중엽 경 쓴 칠언시의 필적이다. “세상의 뜬 이름 헛되도다”로 시작하며 “집 뒤의 작은 샘가에서 적다”고 되어 있다. 2010년 지정된 보물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 답사가) ⓒ천지일보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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