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동구릉 원릉-영조·정순왕후의 능
우여곡절 끝에 왕의 자리 올라
최장수와 최장기 기록을 세워
아들 사도세자 뒤주 갇혀 죽어
성장한 손자 정조, 왕의 뒤 이어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동구릉의 원릉은 영조(조선 제21대 왕)와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다. 영조는 후기 조선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왕이다. 영조는 51년이 넘는 세월을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영조 이후 조선 왕실은 적장자는 물론 제대로 왕위를 이을 왕자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두 명의 왕후 정성왕후와 정순왕후는 자식이 없었으며 후궁 정빈이씨에게 첫 아들 효장세자가 있었으나 9살에 죽고 영조가 41세에 겨우 다시 아들을 보니 사도세자였다. 그러나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으니 27세였다. 영조는 아들의 몫까지 살면서 82세까지 장수하여 24세의 성장한 손자 정조(사도세자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겼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를 홍릉에 묻으며 그 옆에 자신의 자리를 비워두었으나 끝내 함께 묻히지 못했다. 영조가 세상을 뜨니 원릉에 묻히고 29년 후 정순왕후가 그 곁을 차지했다. 조선 후기 가장 안정된 나라를 만들며 장수와 장기재위의 기록을 세운 영조와 왕의 가장 나이차 많은 신부가 되어 ‘영조-정조-순조’ 3대를 살아간 정순왕후의 원릉을 찾는다.     

'원릉'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쌍릉이다. 효종의 영릉(여주로 옮김)의 옛 터에 조성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원릉'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쌍릉이다. 효종의 영릉(여주로 옮김)의 옛 터에 조성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조선 왕들의 ‘롱런’ 기록

조선시대 백성의 평균수명은 35세, 조선 왕(대한제국 황제 포함)의 평균수명은 46.1세였다. 제 21대 영조는 82세로 조선 왕으로서 최장수한 왕이다. 60세 이상 장수한 왕은 6명으로 영조 외에 태조(74세), 고종(68세), 광해군(67세), 정종(63세), 숙종(60세)이었다. 영조는 왕 재위기간도 51년 7개월로 최장기록을 세웠다. 조선 왕 평균 19년보다 몇 배를 넘어섰다. 40년 이상 재위한 왕은 4명으로 영조 51년 7월, 숙종 45년 10월, 고종 43년 7월, 선조 40년 7월의 기록을 세웠다. 이들 4명의 왕의 재위기간이 무려 182년이나 된다. 아버지 숙종과 아들 경종, 영조의 재위 기간만해도 무려 101년에 이른다. 60세 이상 살면서 40년 이상 재위한 왕은 영조, 숙종, 고종 3명의 왕이다.

영조 대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에 따라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영조 대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에 따라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왕비는 어떠한가. 60세 이상 장수한 왕이 4명인 반면 왕비는 19명이었다. 80세 이상 장수한 왕비는 3명으로 단명한 단종, 추존 장조, 추존 문조의 왕후들이었다. 특히 왕의 수명이 짧은 왕의 왕비가 오래 산 경우가 많았는데 단종(16세)의 정순왕후는 81세, 추존 덕종(19세)의 소혜왕후 67세, 연산군(30세)의 거창군부인 61세, 인종(31세)의 인성왕후 63세, 추존 장조(27세)의 현경왕후 80세, 추존 문조(21세)의 신정왕후 82세, 헌종(22세)의 효정왕후가 73세를 살았다. 그만큼 왕위에 있는 왕이 힘들었다는 반증이고 홀로 된 왕후는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조의 왕비와 후궁들도 장수했다.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는 66세, 영조와 51세 차이나는 정순왕후 김씨는 61세까지 살았다. 조선 왕비 평균 수명 51세에 비하면 10년 이상 장수했다. 후궁인 정빈이씨(1694~1721)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1696~1764)도 69세까지 장수했다. 하지만 자식들은 단명했다. 영조는 세제시절 정빈이씨 사이에 효장세자(훗날 추존 진종)를 낳았으나 9살에 죽고, 영빈이씨에게 사도세자(훗날 추존 장조)를 낳았으나 27세에 죽임을 당했다. 두 아들은 단명했지만 아버지인 영조는 그다지 건강하지 않았음에도 장수했다. 영조는 의식주와 체력관리, 질병이나 사고의 예방과 치료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고 알려져 있다. 영조는 어느 왕보다 진찰을 많이 받았다. 실록에는 830회의 진찰기록 중 180회가 영조 대에 있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영조는 평생 7284회의 검진을 받았다고 한다. 왕의 자리에 있음에도 소박하고 검소했다. 병풍이나 가구, 골동품도 제대로 들여놓지 않았고 침실에는 명주이불과 담요 하나가 전부였다고 한다. 걷기를 즐겨 자주 잠행을 다녔다. 식생활도 수수해서 그저 밥과 김치, 장류를 즐겼고 보리밥에 나물을 비벼먹었으며 술은 마시지 않았다.

원릉 능침공간으로 왼쪽이 영조, 오른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원릉 능침공간으로 왼쪽이 영조, 오른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왕세제와 대리청정, 붕당에 휘둘려   

영조(이금)는 1694(숙종 20)년 9월 13일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로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6살에 연잉군에 봉해지고, 경종 즉위 후에 왕세제에 책봉됐다. 1724년 8월 25일 경종이 즉위한지 4년 만에 죽자 엿새가 지난 8월 30일 인정문에서 즉위하니 29세의 조선 제21대 왕이 됐다. 숙종의 인원왕후는 대왕대비에, 경종의 선의왕후는 왕대비, 그리고 빈 서씨는 왕비가 됐다. 그러나 영조가 왕이 되기까지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 숙종은 영조의 이복형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를 사사했다. 또한 경종이 세자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을뿐더러 아들도 없자 왕위계승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숙종은 숙빈 최씨에게서 낳은 아들 연잉군(훗날 영조)도 있었다. 숙종은 노론의 이이명과 정유독대(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했다. 1717(숙종 43)년 7월 19일 임금이 좌의정 이이명을 들라 했다. 이에 승지와 사관이 함께 하려니 이이명 혼자만 입시하라 명했다. 이이명이 함께 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했다.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다시 들어갈 뜻을 굽히지 않고 걸음을 옮겨 나아가려 할 즈음 임금이 입시하라 허락했다. 이때 이이명은 이미 물러나와 임금과의 대화는 전하지 못했지만 연잉군을 부탁한다는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라고 한다.

원릉 석물과 계단이다. 왕과 왕비의 봉분 앞에 혼유석이 각각 놓여져 있다. 또한 영조 때부터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같은 단에 배치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원릉 석물과 계단이다. 왕과 왕비의 봉분 앞에 혼유석이 각각 놓여져 있다. 또한 영조 때부터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같은 단에 배치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경종의 무자식과 질병을 이유로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고 주장했고 숙종계비인 인원왕후에 요청해 관철됐다. 노론의 연잉군과 소론의 경종간 세력싸움이 시작됐다. 소론은 경종의 왕위를 보호하고자 신임사화(신축옥사+임인옥사)를 일으켰다. 1721(경종 1)년 신축년 신축옥사가 벌어졌는데 젊은 경종이 재위하고 있음에도 노론이 연잉군의 대리청정까지 시도했다. 소론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반발이 일어났고 연잉군(영조) 자신도 4차례나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결국 경종은 소론의 반대에 힘을 업어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을 탄핵했다. 1722(경종 2)년 임인년의 임인옥사가 벌어졌다. 노론이 삼수역(三守逆)으로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남인 목호룡의 고변이 있었다. (삼수역, 삼수의 변: 삼수 즉, 경종을 시해하는 3가지 방법을 논해서 생긴 사건 삼수는 ① 대급수-자객을 보내 시해, ② 소급수-음식에 독약을 타서 독살, ③ 평지수-가짜 교지를 받아 폐위). 이 일로 유배 떠난 노론 4대신과 관련자가 처형되는 등 노론이 큰 화를 입었다. 여기에 왕세제인 연잉군도 가담했다하여 목숨조차 위태로워졌는데 다행히 왕대비 인원왕후가 나서서 수습됐다.

원릉의 비각에는 3기의 표석이 있다. 원래의 영조대왕 표석, 훗날 고종이 세운 영조대왕의 표석 그리고 정순왕후의 표석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원릉의 비각에는 3기의 표석이 있다. 원래의 영조대왕 표석, 훗날 고종이 세운 영조대왕의 표석 그리고 정순왕후의 표석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갑작스런 경종 죽음과 왕위계승

이 두 옥사로 노론은 큰 화를 겪었다. 이 상황에서 연잉군(영조)은 난관에 처했으나 갑자기 경종이 승하하는 바람에 오히려 1724년 왕위를 계승하게 됐다.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의 옥사를 문책하면서 노론의 지위는 회복됐다. 정치적 난관에 처한 과격 소론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세력의 제거를 꾀했다.

원릉의 비각에는 3기의 표석이 있다. 원래의 영조대왕 표석, 훗날 고종이 세운 영조대왕의 표석 그리고 정순왕후의 표석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원릉의 비각에는 3기의 표석이 있다. 원래의 영조대왕 표석, 훗날 고종이 세운 영조대왕의 표석 그리고 정순왕후의 표석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과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들은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이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이러한 명분은 민심의 규합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25(영조 1)년부터 모반세력은 커져갔고 결국 이인좌의 난(영조 4, 1728년 3월)이 일어났다. 일부 지배층 소론세력과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공모했고 중간 및 하층민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용병을 샀으며 일부 관군을 회유해 세력을 키웠다.

무신 이인좌의 난은 삼남지역에서 20만명이 참여했고 초기에 각도에서 우세를 펼쳤다. 그럼에도 반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병조판서 오명항과 박문수·박찬신 등이 앞장선 관군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자체의 배신과 작전의 실패로 큰 타격을 받았다. 결국 이인좌·권서봉·목함경 등이 생포 됐다. 영조는 4월 19일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관군이 돌아온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숭례문루에 나아가 장병들을 영접했다. 이인좌는 영조 앞에 끌려와 국문을 당했고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소론정권이 앞장섰으나 난을 일으킨 주모자 대부분이 소론이었기에 결국은 이들이 큰 피해를 입으며 정국의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정자각에서 능상으로 이어지는 ‘신로’는 대부분 작은 다리 형식으로 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정자각에서 능상으로 이어지는 ‘신로’는 대부분 작은 다리 형식으로 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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