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 칼럼니스트

 
우리나라에서는 아득한 시절 단군 시조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다. 조상을 모시는 제사가 형식을 갖추고 자리를 잡은 것은 고려 때부터다. 조선 초기까지는 자손들이 돌아가며 제사를 모셨다. 이것을 윤행(輪行)이라 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손들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재산상속이나 제사 모시는 일에 아들 딸 구분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로 넘어 오면서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한 유교 예법이 보편화되고 종손 개념이 확고해지면서 이 풍속이 사라졌다. 종손이 종통(宗統)을 지키고 이를 위해 더 많은 재산이 필요하다고 하여 재산 상속도 종손에게 많이 해 주었다. 종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장자의 후손이 없으면 다른 후손 중에서 양자를 뽑아 대를 잇게 하였고,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제주(祭主)는 종손이 맡았다.

형식과 체면을 중시하는 조선시대 유교 문화가 반영되면서 신분에 따라 제사의 방법과 내용도 달랐다. 4대 조상의 위패를 사당에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제의 경우에는 벼슬아치나 양반 집안에서나 하는 것이었다. 철따라 지내는 사시제, 조상의 묘에 가서 지내는 묘제, 조상이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제 등이 있는데, 이것들을 빠짐없이 잘 챙겨야 양반 집안, 뼈대 있는 집안이라 했다. 없는 집 자손들은 제사 때문에 가랑이가 찢어졌다.

양반 집안에서는 4대 조상까지 모시는 4대 봉사(奉祀)를 하고 상민들은 2대 혹은 3대 봉사를 하면 되었지만, 상민들도 양반 흉내를 내느라 너나없이 4대 봉사를 하게 됐다. 상민들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라 제사 때가 되면 지방이나 축문을 받으러 다녔다. 축문을 써 주는 사람은 헛기침을 해가며 아는 척을 했고, 집안마다 이것이 맞네, 저것이 옳네 하며 논쟁을 벌이거나 싸움을 하기도 했다.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마라”고 한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지방에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이라고 쓰는데, 여기서 학생은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한 예비관리를 말한다. 생전에 글도 읽을 줄 몰랐던 아버지의 신분을 높여 주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썩 유쾌한 내용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받들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양반 상민 구분하여 차별하는 계급사회의 어두운 면이다.

차례(茶禮)는 원래 설날, 추석, 단오, 동지에 지내는 것이었지만, 요즘은 설날, 추석에만 지낸다. 특히 추석날 지내는 차례는 일 년 중 가장 풍요로운 시기에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하는 의미 있는 행사다.

육당 최남선은 “그릇마다 근심 대신 기쁨이 소복하게 담기니 원체 한 번 놀 만한데 술을 먹기에 밤이 짧을까, 춤을 추기에 땀을 걱정할까, 돌아다보면 헐떡이던 여름이요, 내다보면 웅크릴 겨울이니, 이때를 놀지 않고 어느 때를 기다리랴”고 했다.

추석 명절, 아무쪼록 모두 평안하시길. 고향 길 오가면서 부부싸움하고, 이혼도장 찍는 일만큼은 없으시길. 이번 추석 보름달이 아주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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