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조선 영조 때 박문수는 왕명을 받고 여러 차례 어사로 출사해 탐관오리를 잡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양반 사대부 기득권층의 횡포와 수탈이 극심해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고,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신분제도가 정착하면서 기득권층들은 의무에서 면제되고 그 짐은 힘없는 백성들이 다 짊어져야 했다.

국방의 의무는 백성들 몫이었다. 열여섯 이상 예순 노인까지 남자들은 군역(軍役)으로 일 년에 두 필씩의 무명을 내야 했는데, 이것을 군포(軍布)라 했다. 죽은 사람과 어린 아이에게까지 군포를 내게 했고, 못살겠다며 도망간 이웃집 군포까지 떠맡아야 했다. 무명 한 필을 만들려면 꼬박 열흘 동안 길쌈을 메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군포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가혹한 형벌을 감내해야 했다. 군포 때문에 고향을 떠나 거지 신세로 떠도는 백성들의 수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양반들은 군대는커녕 세금 한 푼 내지 않았다. 백성들이 피땀 흘려 군역을 하고 굶어 죽는 동안 양반들은 글이나 읽으며 세월을 보냈다. 군역의 의무를 행하거나 세금을 내는 것은 양반의 체면에 맞지 않는다 생각했다. 당시 약 50만호가 군포의 의무를 질 대상이었으나 실제로 군포를 내는 곳은 10만호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그 고통이 대단했을 것이다.

박문수는 성격이 괄괄하고 대쪽 같아서 임금에게도 서슴없이 직언을 했다. 영조 역시 성격이 거침이 없고 더군다나 왕이었기 때문에 감히 그 앞에서 함부로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문수는 임금과 큰 소리를 내며 토론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임금도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박문수가 자신의 안위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진심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의 태도를 책망하지 않았다. 영조와 박문수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한 환상의 콤비였다.

박문수의 주장에 따라 백성들로 하여금 소금을 만들게 해 백성을 구제하도록 했다. 당시 소금 제조는 왕실의 귀족들이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고 왕실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었다. 영조는 또 장정당 두 필이던 군포를 한 필로 낮추어 백성들의 짐을 덜어주었다. 균역제를 실시한 것이다.

영조 역시 임금이 되기 전 민가(民家)에서 십년을 산 적이 있다. 이때의 경험이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고 살피는 데 밑거름이 됐다. “너희 양반들 입장에서는 백성들과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나의 입장에서는 모든 백성들이 나의 적자(赤子)다”라고 말할 정도로 늘 백성들의 편에 서려 했다.

영조는 소박한 식사를 하고 무명옷을 입는 등 몸소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임금 앞에 나가는 신하 중에는 일부터 헤진 옷을 입거나 떨어진 신발을 신는 인간도 있었다. 심지어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겉에만 남루한 무명 삼베옷을 입는 인간도 있었다. 요즘도 이런 인간들이 있다.

박문수가 죽자, 영조는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다. 그가 죽었으니 누가 내 마음을 알아줄까”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영조 같은 임금, 어사 박문수 같은 어진 재상이 그리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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