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돈 잘 버는 건 기술이고, 돈 잘 쓰는 건 예술”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최근 강원 영월에서 이 말이 딱 어울리게 기술과 예술을 고루 갖춘 기업인을 만났다. 한옥이라는 형식에 한국의 혼을 담고자 하는 열정이 느껴졌다. IT 기업을 이끌고 있는 그는 엄청난 금액의 사재를 문화재급 한옥마을 건축에 투입하고 있다.

그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한옥 기반 문화플랫폼 시설 중 일부 준공한 ‘영월 종택(宗宅)’ A, B 2개 동을 구경했다. 한옥마을 앞에 평창강이 흐르고, 그 너머 하늘로 솟구치는 듯한 기암괴석을 품은 영월 명소 ‘선돌’ 산맥의 경관에 취해 혼이 뺏길 정도였다. 한옥보다 주변 자연환경이 먼저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국 건축의 주요 특징인 ‘자연과의 어울림’이 무엇인지 그대로 전해준다. 이 터를 물색하기 위해 강원도 곳곳을 3년간 누비고 다녔고, 한옥마을 자리를 100번 이상 살펴봤다고 한다. 조선 초 한양 도읍 터를 정하듯 온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한옥에 대한 IT 기업가의 집착에 가까운 애착이었다. 재산 대부분을 자식에게 물려주기보다 한옥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부터 남다르다. 그는 “자식은 믿지 못하지만 좋은 한옥은 믿을 수 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는 해외 출장을 계기로 한옥에 미치게 됐다고 한다.

“매년 100여개국을 방문해 그 나라의 전통공간에 머물 때마다 한옥에 대한 영감을 받았어요. 13년 전 한옥 연구 본격화 이후 공공 한옥이 정말 부실 덩어리란 사실을 알게 됐어요.”

본인이 직접 ‘찐’ 한옥을 짓기로 했다. 인간문화재급 대목장 30여명 중 18명을 모셔왔고, 태백산맥 줄기 3곳에서 금강송 건조‧가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공장에는 문화재 복원 때의 승인 기준 목재 수분함량(함수율 25%)보다 더 엄격한 15%를 유지하는 마이크로웨이브 장비를 갖추고 있다. 비와 눈을 맞히지 않고 7년간 숙성한 춘양목을 목재로 조달하고 있다. 기와 또한 온도를 달리해 구워내기 때문에 여느 한옥에서 볼 수 없는 변색 기와의 다채로움을 선보인다.

설계와 재료에 들이는 공을 보니 한옥 건축물을 짓는 게 아니라 공예품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온 글처럼 영월 한옥은 “현대도시의 기능적 건축이 아닌 물신주의 반대편의 영혼의 공간이자 본질적 공간”으로 다가왔다. 외적으로 돋보이는 시각적 모습보다 그윽한 목재향을 풍기는 기둥과 서까래,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지는 용마루와 팔작지붕 선, 수채화처럼 펼쳐진 주변 산하를 둘러볼 수 있는 대청마루와 누각 등은 우주 조화 그 자체였다. 어디서든 주변 경관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차경(借景)의 미학이 살아 꿈틀댔다.

10여년 전 인천 강화도에서 한옥의 진수를 전하는 현장을 취재한 일이 떠오른다. 염하강 줄기가 내려다보이는 덕진진 근처 ‘바히네 동산’에 들어선 한옥 살림집, 자연 친화적 연못과 꽃길을 갖춘 ‘학사재(學思齋)’가 인상 깊었다.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가가 한옥 전문가 조언에 따라 대영박물관 한옥 사랑방, 하회마을 심원정사 등을 지은 도편수 손길로 안채, 사랑채, 대문채로 구성된 최고급 한옥을 지었다. 또 전등사 근처 대로변에는 1917년 한옥 대청마루와 일본식 회랑을 절묘하게 배합해 지은 99칸짜리 한옥이 있다. 궁궐 아닌 민가에서 지을 수 있는 최대 한옥 규모다.

백범 김구 선생의 자취가 서려 있는 한옥도 강화읍 주변에 있다.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해 왜병을 살해한 혐의로 인천감리소에 수감된 백범의 옥바라지를 했던 강화도 선비 김주경 선생의 집터에 1928년 새로 지은 ㄱ자형 전통 한옥 구조다. 해방 후 백범이 찾아오기도 했으나 30년 넘게 폐가로 방치된 이 집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회원이 사들여 옛 모습으로 되살렸다.

강화군 하점면 신봉리엔 중요무형문화재 고 김금화 만신(무당)이 한옥 형태의 굿 전수관 ‘금화당’을 남겨놓았다. 이 밖에도 강화도 고려궁지 인근에 옛 사대부집 팔작지붕 형태를 유지한 한옥 10여채가 보존돼 있다.

공공기관이 지은 한옥이 ‘무늬만 한옥’인 날림 퓨전가옥인 데 반해 뜻 있는 기업인과 민간인들이 한옥 유산의 명맥을 잇고 있다. 기술과 예술을 겸비한 이런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