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흉포한 일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사회적 공포심이 극에 치달아 걱정스럽다. 서울 신림역의 ‘묻지마 흉기난동’에 이어 경기 분당 서현역에서의 차량 돌진과 흉기 습격난동 사건은 충격과 경악을 몰고 왔다. 곧이어 서울 경기 부산 등에서 범행 지역과 시간까지 특정한 흉기 테러 예고 글이 현재까지 40여건에 달해 시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인파가 몰리는 지하철 역사나 백화점에선 초비상이다. 한 백화점은 직원들에게 ‘위험지역 방문 자제’를 당부하는 문자 메시지를 급히 전했다. SNS에 전파된 흉기난동 예고 지역을 적시하면서 ‘임직원분들은 금일부터 해당 지역 방문을 자제해주고, 각 부서 팀장은 매장 및 팀원에게 특이 사항 발생 즉시 안전팀으로 연락 바란다’는 내용이다. 경찰은 중고 거래장터, 익명 커뮤니티, 개인 SNS 계정에 올라온 해당 글을 추적해 18건의 작성자를 붙잡았다. 대부분 10~20대들인데, “장난삼아 글을 올렸다”고 한심한 범행 이유를 댄다.

‘외톨이의 습격 테러’ ‘SNS 언어 테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독의 산물이다. 우리는 ‘도시에 갇힌 외로움’에 너무도 익숙히 젖어 있기에 각자의 공간에서 스마트폰만을 주시하고, 거리에선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는 게 당연해졌다.

20년 전 에베레스트 고산족 현장 취재를 같이 했던 절친 A선배와 만나 이런 세태를 얘기하다 주변을 웃게 해주는 가벼운 생활비법을 전해 들었다. 그 선배는 항상 상대를 받드는 자세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심성을 지녔기에 나에겐 흠모 대상이다. 그런 모습답게 본인이 만든 스티커 한 장을 보여줬다. 술병에 붙일 수 있는 손바닥 크기인 일종의 ‘라벨’ 스티커였다. 선배 이름 두 글자를 삽입한 ‘**처럼’이란 글을 가운데 크게 인쇄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건배사로 쓰일 수 있는 ‘평화통일’을 4행시로 덧붙였다. 평화통일 4행시는 ‘평-소에 도와주자! 화-끈하게 도와주자! 통-크게 도와주자! 일-생기기 전에 도와주자!’라는 우스갯소리였다.

평소 이런 농담을 자주 할 수 있다면 삭막해진 도시 분위기도 상당히 부드러워질 것 같다. 초연결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점점 더 고립감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쥐의 실험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태어난 지 3개월 된 생쥐가 우리 안에서 4주 동안 고독하게 지냈다. 어느 날 외부에서 ‘듣보잡’ 새 생쥐가 우리로 찾아왔다. 고립됐던 생쥐는 새 생쥐를 반기기보다 초반에 살펴보기만 하다 곧이어 뒷다리로 서서 꼬리를 세우더니 방문자를 난폭하게 물어뜯으며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고독과 외로움은 분노와 공격을 부추긴다는 교훈을 생쥐 실험에서 얻을 수 있다.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지만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두려움과 분노, 적개심, 흥분이 지배하는 풍토가 돼 버렸다.

이런 풍토에서 A선배의 술병 스티커는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우스갯소리가 첨언된 술병 스티커는 고 신영복 선생의 글씨 ‘처음처럼’을 차용한 것이다. 신 선생은 동시대 소통의 기본을 공부(工夫)라고 강조했다. 그의 마지막 강의를 엮은 ‘담론’에서 ‘공(工)은 천과 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이고, ‘부(夫)는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공부는 결국 ‘살아가는 것 자체’이고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라는 신 선생의 말씀은 큰 울림을 준다. A선배는 우직하게 공부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 만인과의 투쟁 상태에서 공생, 화합, 상생 관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의 소중함은 멀어지고 자본에 종속된 욕망의 바다에서 허덕인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이 말을 떠올린다면 등 돌리고 비틀린 ‘빗장 공동체’ 같은 도시 분위기를 바꾸는 게 가장 시급하다. A선배가 작성한 농담 섞인 상표가 고립된 개인들을 품을 수 있는 에너지를 퍼트릴 수 있는 씨앗이고 종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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