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건설이 시작됐지만, 콘스탄티누스는 트로이 주변의 땅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비잔티움(이스탄불)이 점차 더 중요해졌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는 AD 4세기 중반부터 기독교 주교의 중심지가 됐다. 이후로 이 도시는 당분간 종교적, 정치적 중요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AD 4세기에 발생한 두 번의 대지진으로 주요 건물이 거의 파괴됐다. 인구도 급감했다. AD 6세기, 저지대 도시의 삶은 계속됐지만, 일리온은 점차 폐허로 변하면서 찬란한 과거는 잊혀졌다. 트로이는 더 이상 기독교 세계의 상징이 아니었다. 도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상징으로 남았지만, 트로이와 영웅들의 행동에 대한 숭배는 망각 속으로 가라앉았다. 문서 자료에 따르면, 술탄 정복왕 메흐메트가 트로이를 방문한 중요 인물로서는 마지막이었다. 이스탄불을 점령한 그는 1462년에 트로이 주변을 방문했다. 한 역사가는 이 정복자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술탄 메흐메트는 옛 트로이의 수도이자, 차나칼레의 일부인 일리온을 방문해 고대 유적과 기념물을 포함한 지역 일대를 순시했다. 그는 땅과 바다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시인 호머를 칭송했다. 호머가 칭송한 영웅들의 명예로운 행동을 회상하면서 격정을 토로했다. ‘우리는 이 도시의 적들을 물리쳤고, 오랜 세월 동안 아시아인에게 행한 그들의 모든 악행에 대해 철저히 복수했다.’”

중세에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고, 일리아드의 전설이 번역되면서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트로이 전설도 더 널리 확산됐다. 유럽의 정신에 트로이가 깊고 지속적인 뿌리를 내렸다. 베르질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아스와 트로이 영웅들에 대한 전설은 로마인에게 가장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에서 16세기까지 트로이 전쟁은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 실제 사건으로 간주됐다. 이 신성한 곳을 방문하는 것은 지중해 일대에서 이스탄불로 온 여행자, 학자, 건축가, 예술가들의 중요한 목표가 됐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AD 6세기 이후 잊히기 시작한 트로이의 진짜 유적지가 호머의 트로이인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전환됐다. 이러한 노력이 집중되면서, 프랭크 캘버트(Frank Calvert)와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의 19세기가 도래했다.

일리아드에서 호머는 BC 700년 무렵 트로이 주변 환경을 매우 자세히 묘사했다. 그에게 이러한 정보를 전달한 사람은 오늘날 퇴적물로 가득 찬 고대 에게해의 항구였던 카라 멘데사(Kara Mendersa) 평원의 옛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잘 기억했던 것 같다. 일리아드에 배치된 트로이와 가까운 Bozcaada(Tenedos), Gokceada(Imbros), Samadirek(Samothrace)섬과 카즈(Kaz)산맥의 이다(Ida)언덕은 일리아드에서 잘 보이는 곳으로 세부사항은 지금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 이것이 일리아드의 사실성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19세기와 20세기 초, 많은 고전문헌 학자들은 호머의 일리아드가 전설에 불과하며, 모든 것이 문학적 허구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러한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비판적 연구에 몰두했다. 일부는 호머의 존재 자체도 부정했다. 그러나 17세기와 18세기 이후, 계몽주의가 대두되면서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호머의 전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트로이는 이전의 의미를 되찾았다. 관심이 높아질수록 젊은 시절 호머의 작품을 인정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이 지역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차나칼레 해협, 섬, 산, 강들은 식별이 가능했다. 방문객들은 프라이모스의 요새 유적을 추측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이르자, 많은 사람이 군사적 관점에서 전략적 중요성을 지닌 피나바시(Pinarbasi)가 고대 트로이의 유적이라고 인정했다. 피나바시는 히사를리크(Hisarlik) 언덕에서 8㎞ 남쪽에 있는 한적한 곳이다. 히사를리크 언덕의 높이는 31m에 불과하고, 넓이는 축구장 하나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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