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정치가와 군인들에게 트로이 전쟁은 서양이 동양을 상대로, 유럽이 아시아를 상대로 또는 그 반대로 싸운 전쟁으로 해석한다. 대립적 진영 논리로 어느 한 쪽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배경으로 트로이 전쟁과 그 이후에 벌어진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이 자주 원용된다. 유럽은 이 전쟁의 승리가 유럽이 오래전부터 아시아보다 우위를 증명한다고 과장한다. 트로이 전쟁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신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문학적 창작에 불과하다. 유사한 목적을 가진 정치인이나 군인들은 이 전설로부터 영감을 얻거나, 유사한 스토리를 찾아낸다. 인류가 전쟁을 하지 않고 공존할 수는 없을까? 역사는 이러한 질문에 희망적인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가장 오래된 구체적인 기록은 물론 구전 설화에도 전쟁은 주요한 주제이다. 서양 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인 일리아드는 아예 그 주제가 전쟁이다.

수천년 동안 트로이는 전쟁의 화염에 싸인 도시의 상징이었다. 일리아드라는 전설은 전례가 없었던 분노, 표현할 수 없는 슬픔, 모든 것을 뒤집은 속임수, 파괴된 도시와 어렴풋한 희망을 주제로 한 가장 위대한 서사시로 남았다. 이 이야기는 문학과 미술뿐만 아니라 전쟁과 정치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호머는 구술 형식의 서사시를 통해 전설을 사실로 착각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전설을 전한 호머는 전지전능한 신의 관점에서 트로이 전쟁에서 가장 긴박했던 장면을 묘사했다. 올림푸스, 아토스산, 사모트라스섬, 임브로스섬, 테네도스섬, 트로이 앞에 있던 두 개의 샘, 위대한 도시의 문, 스타만데르강, 아카이아인의 전선이 정박했던 항구, 군사령부, 맹렬한 바람까지도 세부적인 환경과 상황을 바탕으로 서사시에 수를 놓았다.

BC 480년, 동방의 강자였던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 다르다넬즈해에서 가장 좁은 차나칼레해협을 건너기 전에 프리아모스의 요새였던 트로이를 방문했다. 그는 일리온의 아테나여신에게 1천마리의 소를 제물로 바쳤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을 오리엔트인 즉 트로이의 후예로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훗날인 BC 334년, 알렉산더에 대한 저항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차나칼레 지역인 그라니쿠스에서 잊을 수 없는 승리를 거둔 알렉산더에게 동방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이 승리 이후 알렉산더는 트로이와 트로이 전쟁 영웅들의 무덤을 방문했다. 그는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자신의 업적을 전할 호머와 같은 시인이 없다고 한탄했다. 서양인에 해당하는 알렉산더도 자신을 트로이인의 후예로 생각했다. 그의 후계자인 리시마쿠스(BC 301~280)는 알렉산더의 발자취를 따라 폐허로 변한 일리온을 재건하고, 장엄한 아테나 신전을 세웠다. 이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BC 3세기 이후, 로마제국은 트로이를 자기 조상의 발상지로 확정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건국한 율리우스 왕조는 제국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트로이인인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율리우스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로마는 늑대가 양육한 로물루스의 후손에서 트로이 영웅의 후손으로 변했다. 암살되기 얼마 전에 알렉산더의 발자취를 따라 파르티아에 대항하기 위한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던 카이사르는 자신의 고향으로 여긴 트로이에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가 트로이를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트로이가 동서양, 지중해, 흑해를 잇는 편리한 교통의 중심이라는 지정학적 입지 때문이었다. AD 324년,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일리온에 자신의 수도를 세우려고 했다. 그는 로마 건국에 대한 전설과 트로이의 연관성을 염두에 뒀다. 트로이에 제국의 수도를 세우는 것은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정통성을 지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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