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6개의 돔으로 덮인 십자가 모양의 성당은 중앙의 돔 바로 아래에 있는 성 요한의 무덤을 보호하는 거대한 기둥이 지탱했다. 이 성당에는 정확한 건립 일자를 증명하는 황제와 그의 아내를 위한 모노그램과 머리 부분에 푸른 결이 있는 대리석 기둥으로 구성된 견고한 3개의 본당으로 이뤄졌다. 이 기둥은 바닥을 받치는 지하의 납골당과 연결돼 있다. 지하실 앞에 놓인 벽감의 바닥은 두 계단 더 높고, 돔은 4개의 기둥이 지탱하고 있다. 바닥을 덮은 다양한 색깔의 모자이크는 하나씩 뽑혀 나갔다. 그 잔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러나 그 잔해들을 보면서 바닥이 어떻게 조성됐는지를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다. 무덤에서 올라와 창문에 모인 먼지는 신비한 치유력이 있다고 믿었다. 중세 이후 이 성당은 순례자들을 위한 중요한 성지가 됐다.

서쪽에는 초기 기독교 또는 비잔티움 바실리카의 주요 제단인 나르텍스(Narthex)와 세례 지원자나 내부의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로비인 엑소나르텍스(Exonarthex)가 있다. 다른 교회처럼 서쪽 입구는 벽을 더 높이 올려서 다양한 레벨을 적용한 멋진 아뜨리움을 만들었다. 마당은 외부의 난간에서 열 수 있는 현관이 에워싸고 있다. 서쪽 현관 아래에서 3개의 수조가 발견됐다. 이사베이(Isa Bey) 모스크를 지을 때 자재창고로 사용한 곳이다. 성당의 아뜨리움과 이사베이 모스크 사이에서 또 다른 교회 유적이 발견됐다. 여기에는 주교가 거주할 수 있는 여러 개의 방을 갖춘 건물이 있었다.

7세기에 아랍의 침입으로부터 대성당을 지키기 위해 북쪽의 성채와 연결된 성벽을 세우자, 이 성당은 내부의 요새처럼 보였다. 14세기에 아랍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에페수스(에베소)를 방문했다. 그는 대성당이 모스크로 사용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사베이 모스크를 지은 후, 대성당의 중요성은 사라졌다. 14세기 말에 지진이 발생하자 결국 이 아름다운 건물도 무너지고 말았다. 남쪽에서 요새의 입구 역할을 하는 박해의 문 앞에는 두 개의 높은 탑이 있다. 이 문은 아킬레우스를 상징하는 조각상으로 장식했는데, 영국의 고고학자가 보번(Voburn) 수도원으로 옮겼다. 최초의 발굴은 1921~1922년, 고고학자 소티리우(Sotiriu)가 진행했다. 이후 대성당 본당의 2층 기둥을 들어내는 작업은 오스트리아 고고학 연구소가 맡았다. 1976년부터 에페수스 박물관이 발굴과 복원을 계속했다. 대성당 내부는 훌륭한 고고학 공원으로 변했다.

죽음을 앞둔 그리스도는 친구이자 사도인 성요한에게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부탁했다.

“오, 여인이여! 당신의 아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 요한에게 말했다.

“여기 그대의 어머니가 계신다네.”

이후로 요한은 성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후, 성모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함께 첫 번째 교회를 세웠다.

성 요한은 기독교의 기초를 다진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메시아께서 가장 좋아한 제자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맡긴 사람이었다. 기독교가 확산되자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심한 탄압을 받았다. 성 요한의 형제들은 암살당했다. 폭력과 억압이 심해지자, 사도들은 차례로 예루살렘을 떠났다. 성요한은 성모 마리아가 불신의 환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그는 성모를 모시고, 당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에페수스로 옮겼다. 성경의 기록을 감안하면, 당시는 AD4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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