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아카디안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이 교회는 AD2세기에 뮤제스(Muses) 신전 자리에 지었다. 발굴된 비문에 따르면, 뮤제스 신전은 의과대학을 겸했다. 의사와 교수들은 면세특권을 누렸다. 당시 여행자들이 엄청난 통과세를 내야 했던 것에 비하면 그들이 얼마나 중시됐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교회는 4세기에 지었다. 본당에 뒷부분을 추가해 3개의 본당으로 구성된 바실리카식이다. 서쪽에는 기둥이 있는 현관, 넓은 아뜨리움, 대리석 포장도로, 세례당이 있다. 측면 본당보다 좁은 주본당은 장벽과 기둥으로 분리됐다. 바닥에 있었던 모자이크는 사라졌다. 이 교회의 상태가 너무 열악하자, 유스티아누스황제(527~565)가 돔이 있는 두 번째 교회를 짓고 뒤편에 작은 기도실을 추가했다. 교회의 대리석 옴파로스는 목욕탕으로 옮겼다. AD431년, 이 교회에서 열린 Ecumnical 공의회는 안티오키아 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성모 마리아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이해해야 하며, 사도들의 글에는 신성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촉발됐다. 방관하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더이상 좌시할 수 없어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에페수스, 안티오키아 주교와 로마 교황의 사절이 참석하는 에페수스 공의회를 개최했다. 공의회 기간에 도시는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공식보고서에는 성모 마리아가 에페수스에 왔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후 에페수스는 초기 기독교 성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피온산 기슭에는 7명의 젊은 기독교인의 무덤이 있다. Magnesian문과 Vedius 체육관에서 가까운 곳이다. 이 동굴은 지각운동의 결과로 형성됐다. 이곳에는 여러 개의 무덤으로 둘러싸인 작은 예배당이 있다. 1927~28년의 발굴 기간에 이 예배당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5~6세기로 추정되는 수 백 기의 무덤이 발견됐다. 어떤 기독교인은 막달라 마리아가 이곳에 묻혔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와 로마 사이의 첫 번째 갈등은 황제에 대한 숭배와 성전에 희생물을 바치는 것을 기독교인이 거부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로마 전통 관습에 반대하는 것은 범죄였으므로, 이 동굴의 역사는 그것과 유관하다. AD250년 데키우스 황제 치하에서 7명의 기독교인들이 성전에 헌금을 거부했다가 박해를 받고 이 동굴에 숨어들어 잠이 들었다. 깨어나서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그들은 깜짝 놀랐다. 하룻밤이 아니라 200년 동안 잠을 잤으며,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것을 알았다. 데오도시우스2세는 그들의 부활을 신의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죽어서 묻힌 동굴에 작은 예배당을 지었다.

비잔티움 시대에는 에페수스를 ‘Haghios Teologos’라고 불렀다. 셀쥬크인들은 그 이름을 따서 ‘Ayasuluk’라고 불렀다. 결국 1950년에 이 도시의 공식 명칭은 셀쥬크가 됐다. 고대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성채는 미케네 시대인 선사유적을 동쪽 경사면에서 발굴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로마 시대에는 주로 공동묘지로 사용됐고, 비잔티움 시대에 성벽을 쌓았다. 이 지역은 체계적인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 성채 내부에는 예배당, 작은 모스크, 목욕탕이 혼재돼 있었다. 8세기에 투르크족이 자리를 잡은 후, 성벽을 재건하고 아크로폴리스의 비탈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성벽 주변은 여러 개의 탑과 두 개의 문으로 강화됐다. 요새의 남쪽 경사면에 있는 성요한 대성당은 비잔티움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학자인 Eusebe에 따르면, 사도들은 AD37~42년에 예루살렘에서 쫓겨났다. 예수께서 자신의 어머니를 맡긴 성 요한은 성모를 모시고 에페수스로 와서 복음서와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자 Ayasuluk 언덕에 묻혔다. 4세기에 그의 무덤 위에 겸손한 듯 작은 교회를 세웠다. 나중에 유스티아누스와 그의 아내 데오도라가 호화로운 성당으로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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