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지하도 노숙인 만나보니
사범대 교양 영어 교수 하루아침에 전 재산 잃어
보이스 피싱 당한 후 정신에 타격 입고 거리 생활
병원 입원 중 기도 응답받고 오로지 신앙에 전념
백내장‧고혈압 등 건강 악화 형제에게 연락 못해

‘살인 폭염’ ‘극한 폭염’ 올여름 유난히도 많이 듣는 표현이다. 올해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벌써 20명이 넘었다. 서울역 광장에 가면 노숙인들이 아스팔트가 내뿜는 열기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엇이 이들을 이곳으로 내몰았을까. 본지는 노숙인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또 노숙을 극복한 사연도 직접 들어봤다. 이번 호는 보이스 피싱으로 전 재산을 잃고 정신적 충격에 휩싸여 방황하다가 서울역에 정착한 한 노숙인의 사연을 담았다.

[천지일보=홍보영 기자] 최고기온 31도를 기록한 지난 15일 서울 중구 서울역 광장 앞에서 노숙인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지하도 등지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서울역 광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천지일보 2023.08.17.
[천지일보=홍보영 기자] 최고기온 31도를 기록한 지난 15일 서울 중구 서울역 광장 앞에서 노숙인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지하도 등지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서울역 광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천지일보 2023.08.17.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내가 과거에는 최고 인텔리 계급으로 생활하다가 나와보니까 너무 놀랐어. 이런 (노숙인들) 세계가 있는지 상상도 못 했지.”

지난 13일 오후 9시쯤 서울역 지하도. 새벽 4시 반부터 물청소를 시작하는 지하도에서 잠을 깨우고 나와 온종일 밖을 떠돈 노숙인들이 보금자리에 돌아와 몸을 뉘었다. 황기철(가명)씨도 노숙인 20여명 틈에서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70대인 황씨는 커다란 눈에 감지 못한 머리는 빗질이 돼 있었다. 목에는 나무로 된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황씨가 입을 열자 유식한 말이 술술 나왔다.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을 막힘 없이 이야기하고, ‘건축 구조(Construction)’와 ‘건축 역학(Architecture)’의 차이를 논했다.

◆박학다식한 교수에게 생긴 일

황씨는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었다”고 말했다. 그는 성균관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사법고시를 네 번 치른 뒤 그만두고 공주대학교 사범대학교에서 교양 영어를 가르쳤다. 황씨는 어학 외에 음악, 문학, 철학 등 여러 분야에 능통했다. 그는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도 공부하다가 지루하면 다른 책을 보며 머리를 식힐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서울대, 연고대를 나온 초등학교 동문들은 그를 ‘살아있는 백과사전(Walking Encyclopedia)’이라고 불렀다.

그런 그의 인생을 하루아침에 뒤바꾼 일이 생겼다. 10여년 전 친구 어머니 장지에서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이었다. 황씨는 새벽에 비몽사몽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우체국에 분실된 신용카드가 들어와 있다는 전화였다. 우체국 직원은 경찰에 신고해주겠다고 했다. 곧이어 경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경찰은 금융감독원에 안전장치가 있으니 연결해주겠다고 했다. 금융감독원은 신용카드 분실로 피해 볼 확률이 있으니 안전 시스템 제도로 금융 계좌를 이체하라고 알려줬다. 황씨는 “귀신에 홀린 듯 내가 내 손으로 계좌이체를 했다”고 말했다. 황씨가 입금한 돈은 10억원이었다.

◆영등포서 시작된 노숙 생활

황씨는 “그렇게 (보이스 피싱) 당하고 나서 목숨 끊는 사람 심정을 알겠더라”고 말했다. 황씨는 약을 먹고 극단 선택을 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90세 먹은 노모가 눈에 밟혔다. 술을 안 마시면 잠을 못 잘 정도로 술에 의존해 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집을 나왔다. 그때부터 그의 노숙 생활이 시작됐다.

황씨가 노숙 생활을 시작한 곳은 서울 영등포였다. 영등포의 한 교회에서 밥을 준다는 글을 월간지에서 본 기억이 나서 찾아갔다.

“처음에 나와서 보니까 영등포역사에서 (노숙인들이) 박스를 깔고 자는데 나는 그렇게 못 자겠더라고. 신세계 백화점 앞 벤치에 앉아서 잤어. 앉아서 자다가 밥시간 되면 교회에서 와서 예배 보고 밥을 줬어. 그렇게 생활했지.”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서울역 지하도에 노숙인들이 박스를 깔고 누워있다. ⓒ천지일보 2023.08.17.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서울역 지하도에 노숙인들이 박스를 깔고 누워있다. ⓒ천지일보 2023.08.17.

◆노숙인 전담 경찰과의 인연

황씨가 서울역에 온 지는 2년 정도 됐다. 최고의 지식층이었던 그가 거리로 나와 마주한 노숙인의 세계는 이전에 상상하지 못한 세계였다. 황씨가 겪은 서울역 노숙인 중 80~90%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대학을 나왔다는 말에 전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면 거짓말이 금세 탄로 났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남의 물건을 가져가기 일쑤였다.

그는 이곳에서 예기치 못한 인연을 만났다. 서울역 노숙인을 전담하는 남대문파출소의 ‘박 경위’는 공주대학교 출신이었다. 황씨는 박 경위에 대해 “무법천지와도 같은 서울역 광장을 섬세하게 아우른다”며 “이곳에 없어선 안 될 존재”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박 경위도 황씨와 단둘이 있을 때 “은사님, 은사님” 하며 그에게 잘한다.

◆황씨의 눈에 비친 서울역 광장

황씨에게 목에 걸린 십자가에 대해 묻자 그가 눈을 반짝이며 신앙 이야기를 이어갔다.

황씨는 거리에 나온 뒤 그의 기도가 응답되는 걸 체험했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직전이었다. 하루는 아침부터 배가 살살 아프더니 저녁이 되자 죽을 듯 고통스러웠다.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실려 가 검사를 받아보니 소장에 천공이 발견됐다. 황씨는 지인에게 알려야 하는데 알릴 길이 없어 막막했다. 답답한 마음에 간곡히 기도할 뿐이었다. 그 뒤 교회에서 만난 동생이 어떻게 알았는지 병원으로 그를 찾아왔다.

서울역 광장에는 매일 노숙인을 위한 예배가 열린다. 그러나 진정 노숙인을 위한 예배인지는 의문이었다. 황씨는 “예배를 보면 반대급부로 컵라면, 빵이 나오는데 집 있고 자식 손자 있고 살만한 노인들이 이거 받으려고 전국을 뺑뺑이 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 번 받는 것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받는 걸 옆에서 보면 짜증이 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황씨의 옆자리에 누워있던 다른 노숙인도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며 맞장구쳤다.

황씨를 비롯한 노숙인들의 눈에는 ‘자칭 목사’와 ‘진실한 사역자’도 훤히 구분됐다.

“예배 보는 걸 찍어서 유튜브나 SNS에 올리면 사람들은 ‘목사들이 노숙자들, 어려운 사람들 위해 사역하는구나’ 생각해서 후원하는 거야. 후원받은 돈은 자기네(목사)들이 먹고, 빵이나 라면으로 (노숙인한테) 생색내고. 한마디로 밥벌이하는 거지. 그 사람들은 목사도 아니야.”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서울역 서부교차로 밑에 텐트 10여동이 설치돼 있다. ⓒ천지일보 2023.08.17.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서울역 서부교차로 밑에 텐트 10여동이 설치돼 있다. ⓒ천지일보 2023.08.17.

◆모든 걸 잃은 그의 유일한 버팀목

그의 건강 상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한쪽 눈은 백내장이 와서 거의 안 보이는 데다 고혈압, 고지혈증으로 양다리의 피부가 괴사했다. 약을 먹으며 치료받고 있지만 완치되지 않고 있다. 황씨는 힘든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기도할 때마다 내 육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를 드려. 근데 안 고쳐주셔도 감사한 거야. 하나님이 살아계신 걸 100% 믿게 해주신 그 자체가 감사해.”

가족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던 그는 나중에서야 이렇게 말했다.

“5남매인데 형제들도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줄 몰라. 신앙생활 하면서 잘살고 있다고 말만 했지. 자기네들 살 만큼 사는데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면서 형제들한테 부담 주고 싶지도 않고.”

재산도, 가족도, 건강도 잃은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건 ‘신앙’뿐인 듯했다. 그는 신앙생활에 집중하겠단 말만 되풀이했다.

“요새 내가 몸이 아주 최악이야. 이제 과거 생활은 다 접어두고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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