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노숙 극복했지만…

코로나19로 또다시 노숙 생활, 반복된 실직에 “앞이 캄캄해”
수거함서 옷 구하고 원룸촌 남긴 배달 음식으로 허기 달래

 

노숙인지원센터에 도움 요청
2년 반 거리 생활 후 세 번째 겨울 앞두고 스스로 찾아가
“처음엔 마음 열기 힘들어”… 주변 손길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되찾은 평범한 일상에 감사, 사회에 진 빚 갚고 싶은 바람

서울과 수도권, 지방에는 여전히 많은 노숙인이 거리 생활을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2021년 기준 거리 노숙인은 8956명에 달한다. 통계에 들어가지 못한 노숙인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이들은 사회가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이다. 노숙인에게는 의료, 주거, 일자리 등 다양한 방면의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이번 호는 노숙 생활을 하던 중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한 자활 성공인의 사연을 싣는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AI로 생성한 이미지

[천지일보=김민희, 서영화 기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지금은 새로 태어난 기분입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회사가 줄줄이 부도나고 문을 닫았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에 나앉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났다. 이때 ‘노숙인(노숙자)’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노숙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실직’이 꼽힌다. 광주광역시에 사는 50대 신기현(가명)씨를 두 차례 거리로 내몬 것도 실직이었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노숙 생활하던 당시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심정이었다”고 떠올렸다. 그러나 암흑 같은 터널에도 끝은 있는 법. 신씨는 광주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자활에 성공해 현재 1년 넘게 자활근로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이름도 얼굴도 공개하길 거부했지만 “(과거의) 저처럼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통해) 도움받을 수 있는 곳에 마음을 열 수 있었으면 한다”며 용기를 냈다.

◆살려고 발버둥 쳤지만 반복된 실직

인생의 풍파는 한꺼번에 몰아쳤다. 신씨는 지난 2015년 배관 보수 일을 하다가 실직한 이후 인력대행소를 전전했다. 건설 경기가 침체하는 바람에 이 생활도 몇 달 못 갔다. 그와 가족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끈이었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손 내밀 곳이 없었다. 그에게 갈 곳은 거리뿐이었다.

신씨는 가톨릭종합사회복지관의 도움으로 거리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쉼터에서 지내며 직업학교를 1년 넘게 다녔다. 자격증 실기 강사로 취직하고 나니 이제는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신씨가 근무한 지 1년이 채 못 됐을 때 학원이 문을 닫았다. 또다시 인력대행소를 다니던 중 예상치 못한 복병이 찾아왔다. 코로나19로 더 이상 일을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그렇게 두 번째 거리로 내몰렸다.

그는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더 쉽게 포기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전 직업학교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학원에 취직까지 하게 돼서 이제는 조금 달라지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학원이 문을 닫은 거죠.”

신씨는 사회의 경쟁 속도에서도 뒤처졌다. 그는 과거에 수제 햄버거 가게 주방에서 일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제 햄버거가 방송을 타면서 가게가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가 일하던 가게는 경쟁에서 밀려나 결국 문을 닫았다. 신씨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피시방도 운영했다. 그러나 시작한 지 몇 달 안 돼서 사양이 4배 좋은 컴퓨터가 출시됐다. 요금을 낮추는 방식으로 피시방 경쟁에서 버텨보려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저는 진짜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계속 그렇게 꺾였단 말이죠. 학원에서 실직하게 되니까 과거의 기억들까지 합해져서 무너졌던 것 같아요. 더 이상 뭘 해보고 싶지 않더라고요.”

◆“무서운 생존 본능… 사는 법 찾게 돼”

그는 삶을 포기할 생각으로 거리에 나왔다. 그러나 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죽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터미널에 가서 망부석처럼 앉아있다가 쫓겨난 뒤로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아다녔다. 운 좋게 폐업한 모텔을 찾아 주차장에 있는 조그만 방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누군가 모텔에 다녀간 흔적을 보게된 이후 다시 터미널로 돌아갔다. 노숙 생활을 하더라도 불법 주거 침입으로 경찰서까지 가고 싶진 않았다.

신씨는 “생존 본능이라는 게 무서워서 도저히 방법이 없어 보여도 어떻게든 찾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거리 생활하는 요령을 터득해 나갔다. 밤중에 의류 수거함을 돌며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옷을 꺼내 입었다. 운이 좋으면 계절에 맞는 옷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어디 가면 먹을 게 있을까’ ‘어디 가면 갈아입을 만한 옷이 나올까’ ‘어디 가면 잘 수 있을까’ 같이 생존을 위한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끼니는 주로 종교 단체에서 나눠주는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도시락을 받지 못한 날이면 밤이나 새벽 시간대 원룸촌을 다니며 먹다 남긴 배달 음식을 먹었다.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이 골칫거리였다. 머리는 돌아다니다 가위를 주워 대충 자른 뒤 모자를 썼다. 손톱은 시멘트 바닥에 갈았다.

거리 생활하는 사람에게 여름과 겨울나기는 더욱 혹독하다. 신씨는 여름에는 몸에서 땀이 나지 않도록 최대한 움직임을 줄였다. 겨울이면 터미널 화장실에 들어가 눈에 젖은 신발의 물기를 닦아내고, 양말을 휴지 사이에 넣어 습기를 제거했다. 신씨는 “힘들다는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된다”고 말했다.

◆자진해서 도움을 청하기까지

그는 “날마다 잠자리가 불편하고 제대로 못 먹는 것보다 더 겁이 났던 건 노숙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는 나 자신이었다”고 털어놨다. 익숙해지는 순간 빠져나오기 힘든 게 거리 생활이었던 것이다.

혹독한 겨울을 두 번 겪었던 신씨는 거리에서의 세 번째 겨울을 앞두고 결단을 내렸다. 그는 스스로 광주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신씨는 “내가 살 길인 줄 알면서도 마음 열기가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어두운 곳에 오래 있으면 아주 작은 불빛도 무섭게 느껴지는 것과 같았다. 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 갔다가 또다시 거리에 나오게 되면 그땐 더 힘들어질 거란 생각도 그를 괴롭게 했다.

그러나 용기를 내는 순간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거리노숙인특화자활사업에 참여해 긴급 지원을 받아 2년 반의 노숙 생활로 무너진 건강부터 회복했다. 게이트웨이 교육장에서 인성, 자기 계발, 대인관계, 신용 회복 등에 관한 교육을 들으며 일자리에 참여할 준비를 해나갔다. 광주서구지역자활센터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기초생활수급을 받게 됐다.

무언가 해보려 할 때마다 엎어지는 경험이 반복되며 생긴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도 시급했다. 불안 증세가 악화해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뛴다거나 불면증 등 신체 반응으로 나타났다. 신씨는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에서 심리 상담 지원을 받아 극복할 수 있었다.

◆“도움의 손길 받아들이길”

신씨는 “(거리 생활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신씨가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평범한 일상을 산 지도 1년이 넘었다. 그는 자활에 성공한 지금 “새로 태어난 느낌”이라며 벅찬 표정을 지었다.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어느덧 50대 중반이 된 그는 4년 뒤에는 일을 찾아 독립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지원받아 일어날 수 있었던 만큼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한다.

“자진해서 다시서기센터에 찾아가 도움을 청할 때는 인생을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었어요. 최소한 보통의 삶을 살면서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신씨는 과거의 자신과 같이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주변에서 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마음 열기가 정말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피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도움받을 수 있는 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