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고아원서 나와 상경 후 온갖 궂은일 해
폭력조직에 발 들인 후 20년간 험악한 세월 보내
“사람답게 살고 싶어” 조직 생활 청산 후 노점상
빚 떠안고 거리 생활 중 노숙인종합지원센터 도움
청소사업단으로 번 돈 어려운 이웃에 기부하고파

서울과 수도권, 지방에는 여전히 많은 노숙인이 거리 생활을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2021년 기준 거리 노숙인은 8956명에 달한다. 통계에 들어가지 못한 노숙인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이들은 사회가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이다. 노숙인에게는 의료, 주거, 일자리 등 다양한 방면의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이번 호는 노숙 생활을 하던 중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한 자활 성공인의 사연을 싣는다.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김성진(가명)씨가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는 모습. 김씨는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거리노숙인특화자활사업 ‘희망사다리’에 참여해 자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천지일보 2023.08.31.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김성진(가명)씨가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는 모습. 김씨는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거리노숙인특화자활사업 ‘희망사다리’에 참여해 자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천지일보 2023.08.31.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저는 다시 태어났다고 봐요. 예전 그대로 살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지요. 일하고 와서 밥해 먹고 씻고 잘 수 있는 지금이 저에겐 제2의 인생입니다.”

지난 6월 여름, 미라클 청소사업단 승합차가 대전의 한 원룸텔 앞에 멈춰 섰다. 50대 김성진(가명)씨는 청소도구를 들고 내려 건물 복도와 계단을 재빠르게 청소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작은 먼지도 놓치지 않았다. 주차장 쓰레기통에서는 맨손으로 쓰레기를 끄집어냈다. 건물 한 채 청소를 마친 후 그가 숨을 돌리며 말했다. “남의 돈 벌기가 쉬운가요.”

청소라는 일을 많은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라도 김씨에게는 소중하다. 김씨는 지난해 7월부터 대전동구지역자활센터에서 운영하는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2021년 겨울 대전역에서 열흘간 물도 밥도 입에 대지 못하던 그에게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 봉사자가 다가왔다.

그는 지금의 평범한 일상을 누리기까지 우여곡절을 거듭했다. 고아원 출신인 그는 과거 폭력조직에 몸담았었다. 20년간의 조직 생활을 청산한 뒤 노점상을 했지만 빚을 떠안고 거리로 내몰렸다. 그런 그가 자활프로그램에 참여하기까지 살아온 인생을 들어봤다.

◆구더기로 배고픔 달래던 시절

그는 “책으로 쓰면 30권이 넘는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김씨는 6살 때쯤 부산의 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고아원 원장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고아원 어머니는 머리카락을 판 돈으로 쌀을 사서 혼자 200명 되는 아이들을 먹였다. 솥에 물을 가득 부어 끓인 죽의 밑부분은 어린아이들에게 우선 돌아갔다. 큰아이들에게는 위에 떠 있는 물을 줬다.

김씨는 2년 후 친구와 고아원을 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똥지게를 지는 일이었다. 산촌 꼭대기까지 올라가 똥을 퍼 나르면 300~500원씩 받았다. “똥 푸다 보면 구더기가 나와요. 처음에 하도 배고파서 그거 물로 씻어서 친구하고 둘이 먹었어요. 맛있게 먹었어요. 쫀득쫀득하니.”

그는 친구와 지게를 지고 영등포, 청계천 등 서울에 있는 판자촌이란 판자촌은 다 다녔다. 역전 광장, 버스, 큰 건물을 돌면서 껌도 팔았다. 서울 일대는 물론 인천까지 걸어서 가기도 했다. 그렇게 석 달을 하니 판자촌 월세 살 돈이 모였다. 밥은 구걸하거나 길가에 내놓은 그릇에서 남은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그러다 구두닦이 아저씨를 만나면서 구두를 수거하러 다니게 됐다. 한 켤레당 100원씩이었다. 그는 친구와 건물마다 다니며 신발을 50켤레씩 수거해 왔다. 1년 정도 지나자 10만원이 모였다. 그와 친구는 고아원에 있는 동생들을 위해 이 돈을 다 보냈다. 그 후 다시 10만원을 모아 부쳤는데 돈이 돌아왔다. 고아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편지와 함께였다.

“부산에 내려갔더니 상(喪)도 없고 고아원 아이들도 다 없어졌더라고요. 물어보니 (시신을) 화장해서 남포동 쪽 부산 앞바다에 뿌렸다 하더라고요. 저는 웬만하면 잘 안 울거든요. 거기 가서 친구와 둘이 눈이 팅팅 붓도록 울었어요.”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김성진(가명)씨가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는 모습. 김씨는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거리노숙인특화자활사업 ‘희망사다리’에 참여해 자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천지일보 2023.08.31.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김성진(가명)씨가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는 모습. 김씨는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거리노숙인특화자활사업 ‘희망사다리’에 참여해 자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천지일보 2023.08.31.

◆조직 생활에 발 들이다

중학교 2~3학년 나이쯤 됐을 때였다. 어느 날 구두를 닦고 있는데 한 남성이 피를 흘리며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칼에 배가 찔린 상태였다. “그 당시에 어디서 힘이 그리 났는지 모르겠어요. 6~7명이 몽둥이 들고 사시미칼 들고 면도칼 쥐고 따라오더라고요. 그 애들을 작살내버렸어요. 나도 맞기도 많이 맞았고요. (칼에 찔린) 형님 데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는 안 만났어요.”

3년 정도 흘러 나이트클럽에서 보조로 일하고 있던 김씨를 누군가 찾아왔다. 그에게 은혜를 입었던 형님이었다. 그 형님은 덩치 있는 건달을 거느리고 와서는 “내 밑으로 들어와 일을 도와달라”고 말했다. 김씨는 그렇게 조직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때 당시 빠칭코(일본도박게임)가 한창 유행했다. 김씨는 처음에는 서울에 있는 오락실을 맡아서 관리했다. 그러다가 칠성파, 21세기파 등이 있던 광주, 부산 쪽으로 내려가 조직 세계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전국을 다니면서 나도 모르게 차츰차츰 건달 생활에 발을 들인 거죠. 그러다 보니까 전국구가 돼 버렸죠.”

경찰이 일년에 한 번씩 건달 소탕 작전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조직의 윗선에 미리 연락해 피신시킨 뒤 조직원을 50명에서 100명씩 교도소에 넣는 식이었다. 김씨도 교도소를 드나들고 배에 타 도피하기도 여러 번 했다.

◆“사람답게 한번 살아볼랍니다”

조직 생활을 한 지 20여년이 흐르자 문득 회의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렸을 때는 그게 폼이었으니까요. 각 잡고 빠칭코 보고 술집도 좋은 데 다니고 잠도 호텔에서 자고. 애들(조직원)이 양말, 속옷 다 빨아서 개서 갖다주지 구두 닦아서 갖다 놓지 세차해서 갖다 놓지. 딱가리(부하)들이 와서 운전해 주니 뒤에 앉아서 담배 피우고 있으면 됐죠. 화려했죠. 처음에는 참 좋았어요. 그런데 10년, 20년 지나니까 후회가 되더라고요.”

화려한 생활을 후회하게 만든 건 그가 갖지 못했던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었다.

“명절에 부모가 자식들 손잡고 고향 가는 거 보는데 그때 갑자기 (속에서) 뭔가 딱 올라오더라고요. 나는 언제쯤 저렇게 살아보나. 내가 건달 생활을 하면서 계속 살아야 하나. 그때 술을 엄청 많이 마셨어요.”

그에게도 가정을 꾸릴 기회가 있었다. 군대에 있을 때 그에게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 배 속에 아기도 있는 상태였다. 어느 순간 면회를 오지 않자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내와 배 속의 아기가 뺑소니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김씨는 지난 2018년 조직 생활을 그만두겠다고 선포했다. 그는 오른쪽 팔뚝 인대와 신경 2줄로 대가를 치른 뒤 20년간 몸담았던 조직에서 손을 씻었다.

◆노숙인센터에서 건넨 손길

조직에서 나온 뒤 마땅한 일을 찾기가 어려웠다. 김씨는 대출받아 광주에서 채소 노점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파는 물건보다 버리는 물건이 더 많았다. 그는 이자 갚느라 방세 낼 돈이 없어 방을 빼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광주복합터미널에 가보니 수중에 있는 돈으로 딱 대전까지 갈 차비가 됐다. 그는 그길로 대전으로 떠났다.

“대전에 와서 한 열흘 동안 물 한 모금, 밥 한 끼도 안 먹었어요. 하루 이틀은 배가 고팠는데 3~4일 지나니까 몸에 힘이 쭉쭉 빠진달까요. 잠은 지하상가에서 쪼그려 앉아서 잤어요.”

열흘째 되자 배가 고픈지 아픈지조차 모를 정도로 감각이 없어졌다. 허리부터 해서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김씨는 아웃리치(Outreach, 거리 상담)를 하던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 봉사자를 만나 일시보호센터에 갈 수 있었다.

그가 간절히 원했던 건 일자리였다. 그러나 신용 회복이 되지 않으면 일자리를 구하기란 불가능했다. 김씨는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거리노숙인특화자활사업(한국자활복지개발원 주관) ‘희망사다리’에 참여해 신용 문제부터 해결할 수 있었다. 김씨는 신용 회복 교육을 받고 상담을 통해 개인회생을 준비해 나갔다. 이후 지역자활센터 청소사업단에 참여해 지금의 일자리를 얻게 됐다.

몸을 누일 수 있는 보금자리도 생겼다. 김씨는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의 도움으로 전세임대주택에 들어가게 됐다. 그는 자활하게 된 일련의 과정에 대해 “나도 모르게 딱딱 이어지더라”며 “희망사다리를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대전 노숙인을 위한 예산이 삭감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담배꽁초 줍고 쓰레기 줍는 게 다는 아니죠. 내가 개인회생을 하고 싶은데 파산 신청을 하고 싶은데 방식을 모르니까 알려주는 선생님 모셔다가 (교육을) 해야 돼요. 그런데 (예산을) 삭감시켜 버리면 그게 안 되잖아요. 사회에 나가서 일하게끔 하려고 그런 건데 그걸 막아버리면 안 되죠. 난 그게 답답한 거예요.”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김성진(가명)씨가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는 모습. 김씨는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거리노숙인특화자활사업 ‘희망사다리’에 참여해 자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천지일보 2023.08.31.
[천지일보=김민희 기자] 김성진(가명)씨가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는 모습. 김씨는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거리노숙인특화자활사업 ‘희망사다리’에 참여해 자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천지일보 2023.08.31.

◆김씨에게 시작된 제2의 인생

“지금 나는 성공했다고 봐요. 다시 태어난 거죠. 예전 그대로 살았으면 여기(인터뷰하는 자리)에 없지요.”

그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밥을 해서 먹고 씻고 자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전원일기를 보면서 정겨운 가족의 모습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는 지금의 삶이 그의 제2의 인생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때 삶을 비관해 목숨을 끊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극단 선택을 시도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살자고 마음먹었어요. 내 아내, 내 친구, 내 엄마를 위해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나중에 좋은 일을 하려고요.”

그는 현재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해서 번 돈을 틈틈이 모으고 있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떠난 그의 아기를 위해서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한다.

그는 거리에 있는 노숙인을 돕는 건 돈도 먹을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노숙인의 하나밖에 없는 자존심을 건드려 오히려 마음의 문을 더 닫게 할 수 있었다. 그는 노숙인들이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스스로가 극복하려고 마음을 열지 않으면 상대방이 아무리 얘기해도 안 돼요. 그 사람이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줘야 해요. 도와주는 건 물질도 아니고 먹을 것도 아니에요. 마음적(심적)으로. 내가 무엇을 주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스스로 하게끔 다리를 놔주는 거죠. 저에겐 그게 용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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