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피온산 자락에서 아카디안로를 마주 보고 있는 대극장은 수용인원이 약 2만 4000명으로 소아시아에서 최대규모이다. 대리석으로 포장된 길은 항구까지 연결됐다. 도시의 입구인 항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이 극장은 매력적이고 장엄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아르카디안로와 대리석길 사이에 서 있는 이 건물의 높이는 18m이고 3층이다. 오케스트라 뒤의 벽에는 조각상을 포함한 다양한 장식이 돋보인다. 발굴과정에서 생긴 파편은 복원에 사용하기 위해 수집됐다. 첫 번째 2층의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1층에는 긴 복도를 통해 배우와 합창단의 대기실로 연결되고, 중앙에는 오케스트라로 통하는 문이 있다. 1층 무대에는 2.5m 높이의 연단이 있고, 양쪽에 합창단이 서 있는 복도가 있었다. 전체적인 구도는 배우, 오케스트라, 관중이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한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배려는 잦은 개조로 점차 사라졌다. 3개의 발코니와 2개의 원형통로는 주랑(柱廊)으로 덮여 있다. 고위층이 예약하는 관람석 첫 번째 줄에는 대리석 등받이가 있다. 관람석과 오케스트라 사이의 지휘석에는 황제의 자리가 있다. 이 극장은 헬레니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클라우디스황제(31~42)가 다시 지었다. 이후 개보수가 계속돼 완공되기까지는 약 70년이 소요됐다. 사도 바울이 에페수스에 왔을 때까지 극장은 완공되지 않았다. 배우들은 이 지역 민가의 프레스코화에 나오는 것처럼 가면을 쓴 남자들이었다.

극장 한쪽 구석에는 AD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체육관 유적이 있다. 레슬링 학교의 일부는 이미 완전히 복구됐다. 이는 신성한 길과 아카디안로와 연접한 에페수스의 중요한 기념물이다. 기둥으로 둘러싸인 레슬링 학교는 관중이 경기를 볼 수 있도록 북쪽에 관람석이 있다. 트랙은 아카디안로 북쪽에 있으며, 조금 더 가면 아직 발굴이 완료되지 않은 길이 200m인 거대한 Vernus광장이 있다. Harbor Bath의 발굴도 끝나지 않았다. 극장과 광장과 목욕탕은 고대 로마 대중문화의 핵심요인이다. 언덕에서 눈을 감고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항구와 극장을 잇는 대로는 Arcadius(395~408)가 보수했다. 그를 기려 아카디안로라고 부른다. 폐허 사이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밤에는 등불을 밝혔다고 한다. 이는 당시에 매우 이례적인 일로 로마, 에페수스, 안티오키아만 그 특권을 누렸다. 비잔티움 시대에 거리 중앙에 4개의 거대한 기둥을 세웠다. 이 도시와 유관한 요한, 필립, 야곱, 바울 등 4명의 사도를 의미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도로에는 다양한 기념물이 있었으나, 항구가 폐쇄되면서 지금은 폐허로 변했다.

Vedius 스타디움은 말발굽 모양으로 길이 230m, 높이 30m이다. 여기에서 레슬링, 복싱, 달리기 경주가 벌어졌다. 서쪽에는 3개의 아치형 문과 두 줄의 기둥 사이로 난 현관이 있다. 피온산의 경사면에 조성한 계단은 바위를 직접 절단했다. 북쪽의 다른 시설은 단단한 바위 위에 세웠다. 제1경기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지었다가, 네로황제(54~68) 치세에 재건했다. 복원작업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3~4세기, 검투사와 야수의 싸움은 로마제국에서 가장 유명했다. 그러나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소아시아에는 경기장도 없었다. 경기장은 주로 닫혀 있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 에페수스에는 검투사 학교를 세운 Vedius와 같은 몇몇 검투사 가문이 있었다. 많은 기독교인을 야수에게 던져줬다고 알려졌으므로,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후, 그 보복으로 아르테미스 신전을 비롯한 이교도 신전과 경기장은 파괴됐다. 거기에서 나온 건축자재는 성요한교회와 같은 교회 건축에 재사용됐다. 그 덕분에 경기장의 계단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92년 발굴이 시작되자 작은 예배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서 발굴된 유물은 모두 이즈미르 박물관에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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