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올여름은 어느 해보다 무더웠다. 무더웠으므로, 떠났다. 더위를 잊고, 세상살이 고단함도 잊고, 그렇게 잊으며 다시 힘을 내기 위해 떠났던 것이다. 무엇보다 메르스의 공포를 잊을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즐거움이었다. 이글거리는 고속도로에는 피서지로 향하는 차량 행렬이 줄을 이었다. 바다에는 사람뿐 아니라 쓰레기가 넘쳐나고, 그래서 쓰레기와 함께 양심이 버려지고 있다는, 해마다 듣고 보는 뉴스를 또 듣고 볼 수 있었다. 여름은 그렇게 늘 왁자하고, 파리 떼처럼 왔다가 가고, 밀물처럼 들이닥쳤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다. 여름 휴가지라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요란 떨지 않고, 술에 취하지도 않고, 쓰레기로 인해 눈살 찌푸릴 일 없이, 평화롭고 심지어 우아하게 여름 휴가를 보낸 이들도 있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에 어름치 마을이라는 곳이 있는데, 올여름 그곳으로 휴가를 간 사람들이 그랬다. 이 마을에서는 작년부터 문화축제를 열어 지역 주민과 피서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통 소리부터 클래식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펼쳐 한여름 밤의 정취를 더했다.

어름치 마을 공연은 사흘 밤 동안 펼쳐졌고, 관객은 주로 가족 단위 피서객들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 있고, 계곡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수많은 벌레들이 조명 속으로 날아들었으나, 그마저도 불꽃 축제처럼, 반짝이는 별들처럼 아름다웠다. 100여명 남짓한 작은 규모의 관중들을 앞에 놓고 펼쳐진 공연이었음에도, 열기만큼은 대단했다.

첫날 잔디밭 마당에서 펼쳐진 소리꾼 김명자 씨의 소리극 ‘슈퍼댁 씨름대회 출전기’는 우리 소리의 흥겨움을 만끽할 수 있는 멋진 무대였다. 약 15년 전에 처음 발표된 이 창작 소리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동네 슈퍼마켓 여주인이 씨름대회에 출전한다는 내용을 코믹하게 그린 작품이다. 1등을 해서 김치 냉장고를 타야겠다던 다부진 꿈이 모래판에 꼬꾸라지고 말지만, 끝내 웃음을 잃지 않는 슈퍼댁의 이야기가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리가 끝난 다음에는 흘러간 대중가요로 한껏 흥을 돋워 여름밤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다음 날에도 김명자씨는 창작 소리극 ‘오 과장 서해바다 표류기’를 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진땀을 빼는 평범한 직장인 오 과장이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서해 바다로 피서를 떠났다가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이야기다. 가장의 고달픈 일상과 가족을 사랑하는 오 과장의 마음이 관객이 마음을 울리고, 관객들은 오 과장이 과연 죽고 말 것인지, 호기심을 잃지 않고 소리꾼의 입을 바라보았다. 오 과장이 죽지 않고 살아 나오자, 관중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마지막날 밤에는 뮤지컬 배우 4명으로 이뤄진 ‘소울메이트’가 유명 뮤지컬에 나온 명곡들을 불러 관중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했다. 노래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과 함께 곡들을 소개하고 율동과 함께 노래를 불러 마치 뮤지컬의 장면을 옮겨 놓은 것과 같은 멋진 무대가 펼쳐졌다. 관객들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즐거워했고, 얼굴 가득 미소를 안고 돌아갔다.

어름치 마을 공연처럼,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알찬 휴가지의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알찬 무대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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