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천년 전 징키즈칸이 몽골제국을 일으켜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정보의 활용이었다. 그는 동쪽의 고려에서부터 유럽의 폴란드에 이르는 동서횡단의 길을 열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했다. 이 길을 통해 고려의 인쇄술과 고려 인삼이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슬람과 동방의 문화와 문물이 전해져 유럽의 르네상스 싹을 틔웠다. 이 동서횡단 대로의 중요 길목에는 약 40㎞마다 역참(驛站)이 있었고, 역참마다 400두의 말을 두었다. 십 리마다 말을 타고 달려 릴레이로 정보를 전달했는데, 당시로선 획기적인 초스피드 정보망을 구축한 것이다. 이것을 쟘치(驛傳)라 했는데, 오늘날로 치면 세계적인 초고속 정보 네트워크였던 셈이다.

징키즈칸이 이렇게 쟘치를 통해 제국을 경영한 것은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아버지와 부족들을 잃고 초원의 버려진 고아가 되고, 부족을 일으켜 재기하는 과정에서 정보와 여론의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던 것이다. 어릴 적 의형제를 맺었으나 후에 라이벌로 숙명적인 대결을 벌여야만 했던 자무카를 상대할 때도 그랬다. 자무카는 잔인한 지도자이며, 자신이야말로 진심으로 부족민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소문을 내게 했다. 그는 초원을 떠돌며 장사를 했던 이슬람 상인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을 통해 소문이 번져 나가게 했다. 무당을 동원해 자신이 훗날 ‘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게 했고, 이 때문에 많은 부족들이 그의 밑으로 복속해 들어왔다. 징키즈칸은 잔인한 초원의 들개가 아니라 탁월한 심리전술가였던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심리전에 능했다. 그는 고려의 장수로 요동을 정벌하라는 왕의 명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게 도리에 맞지 않고, 장마철이니 활의 아교가 녹고 전염병이 돌 수 있으며, 농사철에 군사를 모으는 것이 옳지 않고 또 왜구가 침입할 수 있으니, 요동정벌은 아니 된다 했던 것이다.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이성계는 목자득국(木子得國)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백성들이 부르도록 만들었다. 목(木) 자 아래 자(子)를 두면 이(李)가 되니, 곧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다. 여론을 가장해 쿠데타를 합리화한 것이다.

아득한 시절 중국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한(漢)나라 유방(劉邦)과 강화하고 돌아가던 중 해하(垓下)에서 한나라 장수 한신(韓信) 군대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병사들이 모두 기가 죽고 기운마저 떨어져 있는데, 한밤중에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왔다. 한신이 투항해 온 초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두고 온 처자 생각에 밤잠을 설치던 초나라 병사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 바람에 항우가 아끼던 우미인(虞美人)도 자결하고, 항우도 31살 아까운 나이에 저승길로 갔다. 유명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유래다.

싸우지 않고서도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했다. 총을 쏘지 않고서도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초나라의 노래에 초나라 병사가 무너져 내렸다면, 대한민국의 한류 케이 팝이 북한 병사들의 마음을 녹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 더 큰 힘이 될 것이다. 휴전선에서 대북 확성기를 뜯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하는 진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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