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천지일보 2023.04.07.
ⓒ천지일보 2023.04.07.

 

<48> 정주영 회장 대선 도전②  

‘통일민주당 창당’ 후 대권 도전장

천만명 넘는 당원수로 당선 기대감

 

“우리가 남이가” 지역감정 악재

‘김영삼‧김대중’ 밀려 패배 쓴맛

 

재벌해체 등 파격적인 공약 주목

차기 대선서 김대중 도와 당선시켜

김대중 대통령 1998년 11월 2일 청와대에서 정주영 현대건설 명예회장을 면담하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 1998년 11월 2일 청와대에서 정주영 현대건설 명예회장을 면담하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정주영 회장은 맨몸 하나로 무에서 유를 창출하면서 국내 1위 그룹 및 한때 전 세계 9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고, 국내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만한 입지전적인 자로 개천에서 용이 된 가장 위대한 사업가다. 박정희 정권에서 건설 붐(경부고속도로, 중동건설 등)과 중화학 붐(조선, 자동차 등)을 타고 현대를 급속하게 성장시켰으나, 군사정권인 5공 시절에 여러 루트로 정부의 압박과 견제를 심하게 받았다. 

◆‘국제그룹 몰락’ 보며 정권에 자세 낮춘 아산

정주영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장기간 연임 시, 당시 국내 10대 재벌에 들었던 국제그룹(회장 양정모)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현대그룹도 이런 일을 안 당하려면 정부의 눈치를 적당히 보면서 처신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양정모 회장은 국제고무로 알려진 왕자표 고무신 하나로 대기업을 만든 자로서 생활은 아주 검소했고 청렴하게 살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정치자금을 내놓으라는 압박에 어쩔 수 없이 5억원을 어음의 형태로 지급하면서 전두환의 미운털이 1차로 박혔다. 결정적인 사건은 1985년 2월 제12대 총선에서 부산지역을 모태로 성장한 양정모 회장에게 부산으로 내려가 선거를 도우라는 전두환의 지시였다. 하지만 당시 양정모 회장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의 제사를 위해 하루 만에 부산을 떠났고 부산지역 선거에서 민자당은 참패했다.

부산지역의 선거 참패와 양정모 회장이 자리를 떠난 사실을 보고 받은 전두환은 당시 ‘공중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을 듣던 힘을 가진 시절이었다. 크게 분노한 전두환이 당장 국제그룹(재계 7위)을 해체하라고 지시하자 국제그룹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됐다.

이런 과정을 살펴본 정주영 회장은 정치자금을 요구받으면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전달했다. 

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면 본인 스스로가 정치에 참여해 이런 구태의연한 정치 부패를 없애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정주영 회장은 정치에 관심이 컸던 아들 정몽준 회장을 현대의 본거지인 울산시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시켰다. 정몽준 회장은 무난하게 당선, 7선까지 연임하면서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의 대표를 지낸 바 있다. 

1992년 12월 1일 정 회장이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1992년 12월 1일 정 회장이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1992년 통일국민당 창당 후 ‘정치인의 길’로

아산은 직선제가 실시된 6공화국 시절 제14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자,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노출하면서 선거에 직접 나섰다.

대선에 나선 이유를 기자들이 묻자 정주영 회장은 “제5공화국에서 어렵게 그룹을 유지해 왔고, 동생 정인영 회장이 옥고를 치르면서 창원중공업(두산중공업)을 강탈당했던 부당한 사건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고 언급했다.

정주영 회장 자신도 5공 집권 초기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때문에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이에 정 회장은 정치권으로부터 핍박을 벗어나기 위해 본인 스스로 정계 진출을 결심하고 정당설립 계획을 1991년 말부터 추진했다.

또한 정주영 회장은 1992년 1월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장으로 선출됐고, 연세대학교 교수 출신의 오피니언 리더인 김동길이 추진 중이던 새한당을 흡수해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정주영 회장 자신이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통일국민당의 강령 몇 가지를 기술하면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삼아 공정하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국정을 혁신 ▲상호보완적 남북 경제교류에 의한 신뢰 구축과 민족 동질성 회복으로 통일을 주도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유지 발전시켜 견실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며 국민복지의 향상으로 경제정의를 실천 ▲법질서를 준수하고 근면과 정직을 존중하는 사회 민생이 안정된 복지사회 구현 ▲도덕성과 책임 의식을 고양하는 교육으로 시민공동체 의식을 배양하며 과학기술 교육을 강화해 21세기에 대비 ▲평등한 사회구조의 정착으로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여성부 신설)를 확대하며 국가발전에 적극 공헌 등이다.  

또한 기본정책은 ▲정치: 닫힌 정치에서 열린 정치로 ▲통일: 정권 유지를 위한 남북관계의 악용 반대 ▲외교·안보: 한민족 경제생활권 확보를 위한 외교 노력 추구 ▲경제: 정부 관여 최소화로 활력있는 국민경제 추구 ▲사회문화복지: 서로 돕는 인간 존중 사회 추구 ▲교육과학: 정직하고 진취적인 인간 형성 추구 ▲여성: 국가발전에 여성의 참여 확대 ▲환경: 쾌적한 환경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 등이다.

1992년 12월 8일 통일국민당 대표로 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정 회장이 경기도 광명시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1992년 12월 8일 통일국민당 대표로 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정 회장이 경기도 광명시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정주영, 388만 67표 받아 3위에 그쳐 

1992년 3월에 치러진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에서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은 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 등 모두 31명의 국회의원 당선자를 내면서 국회 원내교섭단체로 등록됐다. 당시 통일국민당의 대표적인 당선자는 코미디언 이주일이 경기도 구리시에서 당선, 연세대 교수 출신인 김동길은 서울 강남구에서 당선, 정통적인 여당 도시인 수원에서 약국경영의 이호정 당선, 서울 송파구 조순환 당선, 과천·의왕 박제상 당선, 울산 동구 정몽준 당선 등 24명과 전국구 7명 중 순번 1번인 정주영 회장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국회의원선거에서 성공한 정주영은 여세를 몰아 1992년 12월 대통령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런 상황은 국내 정치 역사상 대권에 도전한 최초의 재벌총수로 기록됐다. 통일국민당은 현대그룹의 임직원과 친인척 및 협력사 등을 동원해 당원 수 1200만명을 확보하고 대선에 도전했다.

대표적인 대선공약은 ▲반값 아파트 건축으로 서민들이 큰 부담 없이 생활하는 터전 제공 ▲국가보안법 폐지 ▲대학 입학정원 폐지 및 졸업 자격제 도입 및 사학육성 ▲경부고속도로 복층화(현재 일부 추진 중) ▲초등학교, 중학교 무상 급식 제공(현재 시행 중) ▲재벌해체: 당 대표가 한국 재벌의 아이콘인 정주영이라는 점에서 다소 파격적인 공약임 ▲여성부 설립 및 여성할당제 시행(현재 시행 중) ▲금연 공약(실내 금연 금지로 현재 시행 중) 등이다.

그해 11월 20일에 제14대 대통령선거 공고가 공표되고, 후보군으로 가장 유력주자인 삼당 합당의 주인공인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와 김대중, 이종찬, 박찬종이 출마했고, 정주영 회장은 기호 3번을 배정받았다.

천만명이 넘는 권리당원 확보로 정주영 회장은 당선을 확신하고 최선을 다해서 선거유세를 했다. 하지만 부산지역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감정을 불러오면서 선거 결과는 중학교 시절 하숙집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붓글씨를 써놓고 공부한 서울대 철학과 출신인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가 997만 7332표(41.96%)로 당선됐다.

2위는 통합 야당의 민주당 김대중 후보로 804만 1284표(33.82%)이며, 3위는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로 388만 67표(16.31%)를 받았다.

1983년 미술전시회장에서 당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과 함께한 정주영 회장.
1983년 미술전시회장에서 당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과 함께한 정주영 회장.

◆대선 패배 후 세무조사 등 정치적 탄압 시달려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정주영 회장은 집권 세력으로 새롭게 등장한 김영삼으로부터 정치적인 탄압을 심하게 받으면서 대통령선거법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됐고, 현대그룹은 검찰수사 및 세무조사를 받으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정주영 회장이 겪은 대표적인 정치보복으로는 2년간 현대그룹의 자금줄을 묶어놓은 것이다. 오직 미국계 은행인 씨티은행만이 현대그룹에 대출을 해줘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또 현대그룹에 대한 강력한 세무조사로 당시 돈으로 1361억원이라는 큰돈을 추징당했다.

그러함에도 현대그룹은 무조사의 어려움 속에서도 삼성그룹을 제치고 국내 재계 1위를 재탈환했다. 하지만 문민정부 탄압을 견디지 못한 정주영 회장은 1993년 2월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본인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을 1994년 7월에 해체하고, 당사마저 폐쇄하는 극단의 조처를 내리면서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도 정부의 지속적인 세무조사의 어려움 속에 몸을 낮추고 지냈으나, 김영삼 정권에 대한 울분을 참고 지냈던 정주영 회장은 차기 대선에서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대통령으로 만들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정주영 회장은 정치 진출로 많은 것을 허무하게 놓쳤고, 현대그룹의 분리(자동차, 건설, 중공업, 백화점 등)로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노후에 서산농장에서 조용하게 지내면서 민간외교인 대북정책을 차분하게 준비했다. 

끝으로 필자는 미국의 재벌 트럼프 대통령처럼 대선에서 정주영 회장이 이겼다면 대한민국의 정치·경제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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