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50> 아산 정주영 회장의 대북정책② 

두차례 걸쳐 소 1001마리 끌고 방북

‘3㎞ 트럭 행렬’ 장관에 외신도 관심

 

김정일, 2차 방북 때 숙소 ‘깜짝 방문’

현대에 ‘30년 금강산 독점 개발’ 보장

 

김대중 정부 ‘대북정책’과 궁합 맞아 

“남북경협 일등 공신은 정주영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서산목장에서 키우던 소 1001마리를 몰고 1998년 6월과 10월 북송했다. (제공: 현대그룹)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서산목장에서 키우던 소 1001마리를 몰고 1998년 6월과 10월 북송했다. (제공: 현대그룹)

 아산 정주영 회장은 대한민국 50대 이상의 국민 마음속에는 대한민국 경제개발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기업가이다. 정주영 회장은 이미 알려진 대로 총 4차례의 가출을 시행했는데, 마

지막 가출은 소를 판 돈 70원을 갖고 한밤중에 부친 몰래 홀로 강원도 통천면 집을 나섰다.

그는 인천 부두에서 몸으로 때우는 노동과 서울에서 고려대학교 신축 현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자금을 모았다. 신용을 최고로 여긴 정주영 회장은 어려운 환경(경영회사 아도서비스의 화재 등) 속에서도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현대건설을 설립했다. 이후 자동차, 조선 사업의 성공과 타이밍 맞게 불어온 중동 건설 붐을 통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는데 당시 대한민국 예산의 1/3이 정주영 회장이 벌어온 외화로 알려졌다. 

판문점을 통해 넘어가는 통일소.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판문점을 통해 넘어가는 통일소.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금강산 관광사업 성사… 민간 남북교류 선구자 

정주영 회장은 삼성그룹을 이기고 부동의 재계 1위 현대그룹을 만들었고, 한때 세계 9위 재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정치 실세들의 정치자금 요구의 압박을 받던 정주영 회장은 정치개혁을 앞세워 본인 주도로 통일민주당을 1992년 1월 3일 창당했다. 통일민주당은 14대 총선에서 지역구 국회의원 24명, 전국구 7명의 당선자를 내면서 단숨에 원내교섭단체로 등록됐다. 현대그룹사 임직원들의 적극적인 당원 가입에 힘입어 마침내 ‘통일 대통령, 경제 대통령’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본인의 희망과 다르게 3당 합당을 하고 민자당 후보로 나선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됐고, 아산은 3위로 낙선했다. 크게 실망한 정주영 회장은 민자당 정권 실세들의 집중 견제를 받자, 통일민주당을 해체하고 재계 은퇴를 선언했다.

또한 정 회장은 본인이 만든 서산농장에 내려가 칩거하면서 대북정책을 구상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민간인 신분으로는 최초로 자신이 애지중지 키워온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1998년 6월 1일 육로를 이용, 판문점을 통해 북한 땅으로 첫발을 디뎠다.

아산의 이런 성과는 이후 성사된 금강산 관광사업을 통해 민간 남북교류의 선구자로 국민 가슴 속에 깊이 인식됐다. 이후 88서울올림픽도 정주영 회장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성공했고, 이로 말미암아 정 회장은 국내에서 가장 위대한 사업가로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을 감동하게 했다.

정주영 회장은 소 한 마리라도 북한에서 더 낳게 하려고 총 500마리 중에서 임신한 소를 더 많이 채워 놓을 정도로 세심한 배려를 했다. 1998년 10월 2차 북한 방문 시에는 501마리의 소를 5톤 트럭 15대와 8톤 트럭 35대 등 총 50대에 태워 갔다.

좀 더 상세히 기술하면 이 소들은 충남 서산 간척지에 조성된 70만평의 농장에서 키운 3000여 마리의 소 중에서도 가장 건강한 소가 선별됐다. 1992년부터 정주영 회장이 직접 서산농장에서 키운 소라고 알려졌다.

또한 현대그룹은 건강한 상태로 소들을 북송하기 위해 소들에게 진정제와 항생제를 미리 주사하고 트럭 바닥에 깔린 볏짚을 일일이 소독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서산농장을 떠나 무려 6시간 30분의 긴 여정에 지친 일부 소들은 바닥에 드러눕는 등 피곤한 모습이 사진기자의 필름에 잡히기도 했다.

트럭의 길이가 무려 3㎞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장관을 연출하자 외신기자들도 긴급 보도로 전 세계에 현대의 위상을 알렸다. 또 당시 정주영 회장의 방북을 환송하러 나온 한국건우회 소속 최양임씨는 “나도 황해도 연백을 고향으로 두고 살아가는 실향민”이라며 “북한으로 가는 소가 부럽다”는 말을 TV로 전달했다.

정 회장이 ‘2차 소떼 방북’을 한 1998년 10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제공: 현대그룹)
정 회장이 ‘2차 소떼 방북’을 한 1998년 10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제공: 현대그룹)

◆북한 땅 첫발 디딘 아산, 감회 눈물 흘려

행사장에 도착한 정주영 회장은 잠시 실향민 천여명 환송객들의 축하 박수에 손을 흔들며 답례 인사를 한 후 미리 준비한 소의 고삐를 쥐고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했다.

당시 짙은 회색의 중절모를 쓴 정 회장은 고령인 탓에 손녀의 부축을 받기도 했으나, 본인이 태어난 고향으로 간다는 기분에 비교적 밝은 모습을 보였다.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계획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이 쏟아지자 가벼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노년의 정주영 회장을 태운 청색의 다이너스티 승용차는 적십자기와 꽃다발 등을 흔드는 환송객을 뒤로한 채 8시 40분경 통일대교를 건너 판문점으로 갔다.

또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등 방북단 일행이 탑승한 버스와 소 사료를 가득 실은 트럭 50대, 북한에 선물할 최고급 승용차 다이너스티 20대가 뒤따라서 방북했다.

방북 행사장을 출발한 정주영 회장 일행은 9시 30분경 판문점 자유의 집에 도착했고, 비서진의 부축을 받으며 자유의 집 2층 귀빈실에 들어섰다. 정주영 회장은 10여분 동안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인사말’을 한줄 한줄 낭독한 뒤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 후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내 군사분계선을 넘으면서 북한 땅에 첫발을 디딘 정주영 회장은 방북에 대한 감회의 눈물도 흘렸다. 정주영 회장 뒤로는 자유의 집에서 걸어서 중립국감독위 회의실 앞까지 도보로 이동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김영주 한국프랜지 회장,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정희영 여사, 김윤규 현대대북경협사업단장 등이 따라갔다.

이후 북한 땅을 방문한 정주영 회장은 2차 방북 시 깜짝 선물을 받게 됐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김정일 위원장이 정주영 회장단이 묵고 있는 숙소(김일성 전 수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 바로 옆 백화원 초대소)를 방문했다.

이는 폐쇄된 북한에서는 예외의 일로 기록된다. 필자의 판단은 노년의 정주영 회장이 2번째로 방북하는데 인사 차원에서라도 면담하는 것이 좋겠다는 김정일 위원장 비서진들의 권고를 받고 갑자기 면담차 예고 없이 아산의 숙소로 찾아온 놀라운 사건으로 보인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배석한 김용순 아태평화위원장에게 “정주영 회장의 대북사업 진행에 문제가 없느냐”를 되물으며 “현대그룹 사업에 차질이 없도록 도와주라”고 지시하며 각별한 관심을 표방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현대에 30년간 금강산 독점 개발권을 보장했다.

지난 1998년 정 회장과 소 500 마리를 실은 트럭이 새로 개통된 통일대교를 넘어 판문점으로 향하고 있다.  (출처: 현대그룹)
지난 1998년 정 회장과 소 500 마리를 실은 트럭이 새로 개통된 통일대교를 넘어 판문점으로 향하고 있다. (출처: 현대그룹)

◆1999년 대북사업 총괄 현대아산㈜ 설립

이후 금강산 사업은 순항궤도에 올랐고 1998년 11월 18일 강원도 동해항에서 현대금강호 선박이 북한을 향해 출발하면서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됐다. 이어 현대는 1999년 3월 대북사업을 총괄할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도 적극적으로 정주영 회장을 지원했다. 김대중 정부의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비서관이었던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정주영 회장은 고향 통천면 아산리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방북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증언했다.

정 회장은 한반도 제일 명산인 금강산을 세계적 최고의 관광명승지로 개발해 국민에게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정 회장은 사석에서 “내가 현대그룹에서 벌어들인 돈을 북한에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자주 얘기했다고 한다. 

한국 내 다른 경쟁회사들은 대북 경협 사업에 대해 “돌다리도 두드리고 조심스럽게 판단하고 추진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북한 출신의 정주영 회장은 특유의 돌직구 경영 정신으로 “어느 누가 뭐라고 반대해도 나는 추진한다”면서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정주영 회장의 대북경협 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전략과 맞아떨어지며 순항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이 사업의 일등 공신은 정주영 회장이라며 공식 석상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대중 정권 초기 핵심 장관급 발언에 의하면 “현대의 추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북한의 인맥이 전혀 없던 정부는 현대의 도움으로 대북 협력 창구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그저 현대그룹에 고마울 뿐이라고 모든 공을 현대의 성과로 돌렸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꿈인 통일 조국은 북한 정권의 변덕스러운 꼼수와 현대의 내분, 현대의 금융 유동성 위기 등이 겹치면서 아쉽게도 좌절됐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현재 시점으로 판단 시 남북한의 극단적인 군사 대결은 결코 장기적으로 보면 남북한의 긴장을 극대화했다. 어찌 됐든 간에 우리 민족 스스로 미국, 러시아, 중국의 도움 없이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마지막으로 재벌가 중 가장 검소하게 살다 간 정주영 회장의 기념관에 전시된 ‘아산’이 10년 이상 입은 헐거운 양복과 낡은 구두를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청렴결백하게 인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위대한 사업가 정주영 회장에 대한 생각이 같이한 시대를 동고동락했던 필자의 가슴속 깊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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