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출신 의암 손병희 선생
‘항일정신의 불꽃’ 된 한봉수
제천 중심 의병운동 활발해
집단 창씨개명 거부한 보은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피 흘려 희생한 3.1독립만세운동이 올해로 104주년을 맞이했다. 광복 78주년을 맞아 본지는 손병희를 필두로 민족대표 33인 중 6명을 배출한 충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아울러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단재 신채호, 예관 신규식 등 자랑스러운 충북인을 소개하고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그 의미를 되짚고자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의암 손병희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겠소.”

민족대표 33인의 가장 대표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운동을 전개하기 직전 이같이 말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길 염원하는 수많은 태극기 물결이 거리를 뒤덮었다.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원칙으로 항거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의암 손병희 선생은 1922년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생을 마감한다. 충북 청주시 북이면에는 의암 선생의 생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충북은 손병희를 필두로 민족대표 6인을 배출했다. 국토 중심부에 위치한 험준한 산세는 의병들의 전략적 요새로도 활용됐다. 3.1운동의 104주년을 맞아 도내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의 흔적을 살펴봤다.

◆청주, 3.1운동의 주역부터 ‘번개대장’ 의병장 출생지

 

1905년 일본에서 동지들과 함께 있는 손병희 선생 (앞줄 오른쪽 두번째) (출처: 독립기념관)
1905년 일본에서 동지들과 함께 있는 손병희 선생 (앞줄 오른쪽 두번째) (출처: 독립기념관)

의암 손병희(1861~1922)는 충북 청주시 북이면 금암리 대주촌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다. 동학농민운동의 근간이 됐던 동학에 입문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충청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관군과 싸웠다.

이후 1897년 37세에 동학의 3대 교조가 됐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침탈했다. 손병희는 십여년 전부터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를 구성하는 등 독립운동 조직의 형태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국권 침탈 후 “10년 안에 나라를 찾겠다”며 북한산 자락 아래 봉황각에서 독립운동을 도모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가장 대표로 참여해 기미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한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모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1922년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손병희 선생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추서했다. 그의 생가는 1882년 동학에 입문하기 전까지 살던 곳으로 1971년 낡은 초가집을 보수해 재복원됐다.

유격전의 명수로 이름을 떨친 청주 출신 의병장도 있다.

내수읍 세교리에서 출생한 청암 한봉수(1884~1972)는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후기 의병장이다. 그는 평민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를 이끌면서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를 처단하고 밀정과 변절자를 응징했다. ‘번개대장’이라는 별명같이 신출귀몰한 명수로 진천, 보은 등지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을 모아 일본군 중위를 비롯해 일본군 수십명을 처단해 무적장군이라고도 불리웠다.

1967년 한봉수 공덕비 개막식에 참석한 한봉수 의병장의 모습. (출처: 천안 독립기념관)
1967년 한봉수 공덕비 개막식에 참석한 한봉수 의병장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특히 한봉수 의병장은 독립운동사의 양대 산맥인 의병과 3.1운동의 가교적 인물로 평가된다. 1910년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음에도 이후 감형으로 풀려나 또다시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혼을 불살랐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1일 고향인 세교리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튿날에도 내수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장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하다 체포돼 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지금도 충북도청 뒤쪽 청주 상당공원에서 그의 동상과 함께 그의 연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고장 청주 항일정신의 불꽃이요, 의로운 기상의 상징이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제천의병·단양 독립군자금 총책도

창의 116주년 제천 의병제 행사에서 펼쳐진 가장행렬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창의 116주년 제천 의병제 행사에서 펼쳐진 가장행렬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충북 제천은 전국 대비 의병활동률이 2배나 높은 지역이다. 충북향토사연구회에 따르면 이는 호좌의진의 맹렬한 투쟁 영향인 것으로 분석된다.

제천은 호서의병본부로, 지금의 사단장 급 지휘본부였다. 호좌의진은 1896년 초에 강원도 영월에서 유인석을 필두로 모인 의병 조직이다. 제천의 화서학파 선비와 지평 출신의 포군을 주축으로, 제천을 근거지로 삼고 항일 투쟁을 전개했기에 제천의병이라고도 한다. 이 의병들은 충주성을 점령했고, 제천을 비롯한 충청북도·강원도 영서 지역의 10개 남짓한 고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면서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일제에 대항하기를 머뭇거리는 의성 군수와 예천 군수의 목을 베고 천안 군수에도 죄를 물어 죽여 ‘3관찰 6군수’를 벤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친일 관료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된 호좌의진이다. 이들의 투쟁에 그 명성을 듣고 제천에 모여든 군중으로 타 시도에서는 유례가 없는 대규모 연합 의병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전경. 이곳에서 당시 격전이 벌어졌었다. (출처: 독립기념관)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전경. 이곳에서 당시 격전이 벌어졌었다. (출처: 독립기념관)

그런가 하면 충북 단양군은 대대 중대 소·대전투가 50여회나 이뤄진 전투지였다. 단양에서 충청·경상·강원 3도로 독립군 자금책의 맹활약을 하던 김용재 의사가 있다. 김용재(1900~1908) 의사는 평안북도 회천군 서면 극성리에서 출생해 독립군자금 모집총책으로, 또 상해임시정부 독립군자금 조달책임자로 일했다.

김용재는 모금을 모을 때 “일본의 학정과 만주에서 밤낮을 모르고 일본군에 쫓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는 독립군에게 보내는 자금”임을 늘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지방에서 부를 축적한 권력가나 친일행위로 부자가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모금을 모았다.

모금을 거절할 시 요구 금액에 상응하는 재산, 물적 피해를 직접 입혔다고 전해진다. 집에 불을 내거나 마구간의 소를 죽이는 등 상당한 피해를 끼쳐 일대 부자나 친일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에 일본 경찰이 그를 생포하려고 시도했으나 기묘한 호신술로 번번이 작전 지역을 순식간에 벗어났다고 한다. 권총에도 명사수였던 그의 체포가 번번이 실패하자 단양경찰서의 일본인 서장이 체포 포기를 상부에 보고, 조선총독부가 그에 사살 명령을 내렸다.

단양경찰서는 대대적인 김용재 체포 작전에 열을 올렸다. 이들은 단양군 영춘면 동대리 형제봉에 은거하던 김 의사를 체포하기 위해 2개 조로 마을 길목에서 잠복을 시도하기도 했다.

◆‘천연 요새’ 활용된 보은… 창씨개명 집단거부도

보은군 삼년산성 진입부 (출처: 독립기념관)
보은군 삼년산성 진입부 (출처: 독립기념관)

충북 보은은 의병활동의 주요 집결지였다. 해발 1100m에 달하는 속리산의 험준한 지세 때문이었다. 백두대간에 뻗은 산줄기는 ‘천연 요새’와 다름없었다. 한말 전국 최초의 의병이었던 ‘문석봉 의병’이 등장한 곳도 바로 보은이다.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검객이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문석봉(1851~1896)의 주도로 의병이 봉기했다. 그는 읍에 군중을 모아 “국모를 살해한 적들을 토벌하는 의거를 일으키자”고 외쳤다. 보은 주변을 근거지로 의병들은 속리산으로 모였다. 문석봉 의거는 사실상 제대로 된 전투 없이 체포돼 불발됐지만 보은 민중의 정의감과 저항정신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1907년 보은에서 벌어졌던 의병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의환의 ‘의병운동사’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실효된 민가가 전국 4075호, 충북 786호 중 585호가 보은군 피해호수’였다고 증언한다. 강압과 감시에 대항했던 보은 민중에 일제는 가차 없이 혹독한 처벌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청주감옥이 보은사람 아니면 빈다’는 말도 유행했다. 보은 일대에 의병들이 활약한 결과, 경술국치 이전 일제에 강점되는 모순을 겪기도 했다. 1909년 5월 15일 통감부 경찰국은 보은에 30명의 병력을 주둔시키며 감시에 들어갔다.

창씨개명에 항거한 신개울마을. (출처: 보은군청 공식블로그)
창씨개명에 항거한 신개울마을. (출처: 보은군청 공식블로그)

문화류씨 집성촌인 ‘신개울마을’은 창씨개명을 집단 거부한 유일무이한 지역이다. 창씨개명이 시작된 1940년 마을 주민 119명은 “씨족문화의 근간은 효행인데 이를 말살시키는 창씨개명을 용납할 수 없다”고 목숨을 내건 항거에 나섰다.

조선총독부는 이들에 가혹한 보복을 행했다. 식량 및 배급이 중단돼 배를 곯아야 했고 문화 류씨 족보를 찍었던 목판과 400년 이상 된 장서를 불태웠다. 원인불명의 행방불명자와 의문사한 주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산대초등학교로 등교하는 어린 학생들은 마을 굴참나무 아래에 묶고 조롱하며 집단폭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본 마을에는 이를 기리는 사적비가 있다. 다음은 사적비의 내용이다.

‘창씨개명을 강행한 것은 세계사상 초유의 민족과 민족사관을 말살한 역사적 사실로 이는 국가를 강점당한 역사이므로 잊어서는 아니될 치욕사이다. 문화 류씨 친족은 유일한 창씨개명을 집단 거부함으로 형언할 수 없는 수모와 탄압의 수난으로 인적심적물적 피해가 겹친 고통을 받아(중략)’

이들 마을의 창씨개명 거부에서 독립선언서 속 근간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에서 ‘우리는 우리가 본디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조선 민족의 우수함을 꽃피우리라’고 선언했다. 민족의 자긍심과 기지는 타협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타고난 자유권이라는 것이다. 3.1운동의 거사는 한민족의 독립투쟁을 넘어 정의·인도·생존·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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