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아버지라 불리워
민주주의를 꿈꿨던 혁명가
청주시 가덕면 독립운동가
상하이로 건너가 기반 다져
임시정부 이념 근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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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 신규식 선생의 생전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예관 신규식 선생(1880~1922)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립운동가다. 그의 호 예관(倪觀)은 ‘흘겨본다’는 의미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된 후 의병 거사마저 여의치 않자 음독 자결을 기도하다 오른쪽 눈의 시신경을 다쳤다. 이후 그는 ‘겨레가 자유를 잃고 고통을 당하는데 이 세상은 흘겨보기에 맞다’며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다소 특이한 호만큼이나 그는 끊임없이 혁명을 꿈꿨고 실천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그는 약 3억원의 지참금을 품고 혁명의 땅 상하이로 향했다. 그곳에서 중국 혁명파를 이끌던 쑨원을 만나 지원금을 건네며 “빨리 혁명을 성공하고 우리를 지원해달라”고 당부한다. 훗날 임시정부 시대를 이끈 선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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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상하이 정안사로 올림픽 극장에서 3.1절 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 이하 국무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맨 왼쪽 신규식이 앉아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올해 충북도는 예관 신규식 선생 순국 100주기를 맞이해 추모 행사 및 청남대 기획전시를 마련하는 등 다방면 사업에 돌입했다. 이에 본지는 지난달 29일 임시정부의 뿌리를 자처한 신규식 선생의 발자취에 따라나섰다. 

◆신채호와 교육 선구자로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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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신규식의 생가. ⓒ천지일보 2022.11.01

충북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에는 신규식 선생의 생가가 있다. 외벽과 지붕은 사람 손을 탔지만 아직도 생가 대문에는 흔적이 남았다. 1880년 인차리 마을에서 태어난 신규식은 어릴 적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다. 세 살 적에 천자문을 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산동신씨(山東申氏)라고도 불리는 고령신씨는 신숙주의 후손이다. 청주 낭성·가덕·미원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뤘던 그곳에서만 무려 15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그중에서도 ‘산동삼재’, 곧 세 천재라 일컬었던 이들이 바로 신백우·신채호·신규식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는 비탄과 절망에 빠졌다. 이상설은 거리로 나가 땅에 머리를 찧어댔고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설움을 토해냈다. 이 시기 신규식은 교육을 통해 민중을 깨우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는 저서 ‘한국혼’에서 “마음이 죽어 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나니 우리나라의 망함은 백성들의 마음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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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문동학원이 세워졌던 신횡호의 고택. ⓒ천지일보 2022.11.01

그는 또 “마음이 죽어버리지 않는다면 백성의 마음에 각자의 대한이 있을 것”이라며 1901년 문동학원을 세운다. 고종 18년에 건축된 가덕면 인차 3길 독립운동가 신횡호의 고택이 그곳이다. 신횡호의 부친 신정식이 의병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해서 일본군이 찾아와 훼손하고 현재는 안채만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 신규식과 신채호가 신학문을 가르쳤다는 증언이 있다. 학자들이 이 작은 고택을 청주의 근대를 이끌어간 장소이자 교육의 요람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1908년 5월 들어서는 재경 고령신씨들과 영천학계를 출범한다. 국가의 치란(治亂)과 존망, 민족의 문명과 야만과 성쇠 모두가 교육의 흥패에 달려있다고 그는 보았다. 

◆상하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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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청주시 문의면 청남대 임시정부 특별관에 예관 신규식의 특별 기획전이 마련돼있다. 사진은 신규식의 망명 경로 안내도. ⓒ천지일보 2022.11.01

청주시 문의면 청남대 기획전시에서 그의 망명 일대기와 저서를 살펴볼 수 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국독립을 꿈꾼 많은 이들은 중국 동북 땅 만주와 연해주로 떠났다. 이와 달리 신규식은 압록강을 건너 1911년 하순 남쪽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한국혼’을 통해 “옛 궁터는 무너져 내 마음을 슬프게 한다. 역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지조와 절개, 내 가슴에는 큰 아픔 뒤의 고통이 남아있다”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훗날을 도모한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된 도시였던 상하이로 망명한다. 쑨원의 중국 혁명파가 신해혁명을 주도하기 직전이었던 이 도시에는 혁명의 기운이 가득했다. 당시 황제가 없는 공화당을 꿈꿨던 중국 혁명파에 신규식은 거사 성공 후 자국의 독립운동을 도울 것을 요청했다. 공화에 성공한 쑨원이 대총통에 당선되고 신규식은 쑨원을 비롯해 중국 주요 인사와 긴밀히 교류한다. 신규식의 선구안이 날개를 달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동제사 조직하고 상부상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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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제사의 주역들. 왼쪽부터 단재 신채호, 우창 신석우, 예관 신규식.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여기서 예관 신규식이 꿈꿨던 조국의 미래상을 엿볼 수 있다. 그가 꿈꾼 나라는 황제가 있는 제국이 아닌 ‘민국’이었다. 그는 본관이나 호적을 묻지 않고 온건이든 급진이든, 농부든 선비든 동지가 될 수 있는 대한민국을 소망했다. 당시 민(民)자는 천하게 여겨졌다. 그랬던 시대에 신규식은 왕이 아닌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열망했다. 1912년 7월 상하이에 한인 독립운동 비밀결사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다. ‘동제’의 뜻은 동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동제사는 겉으로 생활 개척을 위한 상조회사를 표방했지만 이면에는 조국 강산을 되찾자는 큰 뜻을 세웠으므로 곧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로써 상해를 중심으로 중국 내 우리 동포들이 상부상조해나갔다. 당시 상해 등지로 망명 동지들도 점차 모여들고 있었다. 조직은 점점 몸집을 불렸다. 이곳에서도 그는 박달학원을 세우고 독립운동가와 한인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민족자결원칙 대두 급물살 타

동제사 간부에는 박은식·신채호·홍명희·조소앙·문일평·박찬익·조성환·김규식 등이 활동했다. 사원수는 약 300여명에 이르렀다. 동제사는 점차 광복운동의 중심기구로 자리 잡아 나갔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문도 이때 발표된다. 이 선언문은 임시정부의 근간 이념을 제공했던 중요한 단서다. ‘하나되자’는 단결인식에 주도적인 역할을 이끈 이도 바로 신규식이다.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을 포함한 14개 원칙을 제창하면서 민족자결원칙이 대두되자 세계의 흐름이 급물살을 탔다. 간부들은 외국뿐 아니라 국내 동포들과 함께 맞손을 잡고 동시에 운동을 전개하자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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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시정부 첫 청사였던 하비로 임시정부의 모습. 사진엽서로 제작됐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신규식은 법무총장과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된다. 2년 뒤 이승만의 특사 자격으로 광동으로 파견된 그는 쑨원 정부로부터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크나큰 외교 성과를 거둔다. 그의 판단이 눈 부신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듬해 신규식 내각은 연이어 공로를 일군다. 태평양회의에 외교수행을 하고 중국 쑨원 호법정부와 외교 협조를 해냈다. 

◆망조의 시작 ‘양심’ 잃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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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1922년 9월 30일 독립신문에 실린 신규식의 부음 기사. ⓒ천지일보 2022.11.01

신규식은 망명 이후 가덕면 집에 30여통의 편지를 보내며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했다. 1922년을 끝으로 편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는 임시정부 내부에 크고 작은 내분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과로와 단식 등으로 1922년 9월 25일 43세를 일기로 영면한다. 

신규식은 통탄의 마음으로 네 가지를 잃게 됐을 때 나라를 잃게 된다고 했다. 그것은 ‘선조의 가르침과 종법’ ‘선민의 공로와 재능’ ‘국사’ ‘국치’다. 그는 법으로 다스릴 정치가 문란해지고 쓸데없이 남에게 아첨하며 파벌을 만들어 싸우는 등 모든 망조의 시작은 ‘양심’을 잃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열정의 씨앗으로 움튼 임시정부 역시 갈등에 치닫자 그는 상처가 아물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괴로움에 곡기를 끊고 영면했다. ‘민국 정신’에 힘썼던 신규식의 이념은 이후 대한민국정부의 근간으로 이어졌다. 

올해는 신규식 선생의 순국 100주년이다. 100년이 지나서야 그는 올해 8월 가덕면 주민으로 입적했다. 한 세기가 흘렀지만, 그가 꿈꿨던 나라는 세워졌는지 신규식 선생의 발자취를 살펴본 이들에게 그는 여전히 물음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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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1915년 신규식이 동료 홍명희에게 화답시를 바라며 지은 시. ⓒ천지일보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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