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서학파 유인석이 조직해
3000여명 규모 활약 펼쳐
일제 폭압에 ‘잿더미’ 되기도
13년간 의병 활약한 제천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제천의병군들의 모습. ⓒ천지일보 2023.04.11.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제천의병군들의 모습. ⓒ천지일보 2023.04.11.

 

편집자 주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피 흘려 희생한 3.1독립만세운동이 올해로 104주년을 맞이했다. 광복 78주년을 맞아 본지는 손병희를 필두로 민족대표 33인 중 6명을 배출한 충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아울러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단재 신채호, 예관 신규식 등 자랑스러운 충북인을 소개하고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그 의미를 되짚고자 한다.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더운 초가을이었다. 제천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산등성이에는 일장기(旗)가 눈부신 햇빛으로 선명했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도 반사하여 번쩍이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거리로 나가 잿더미 위를 걸었다. 일찌기 나는 이렇게 처참한 광경을 본적이 없었다.’ 맥켄지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

의병활동의 근거지로 지목되어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된 제천. (제천시청 제공)
의병활동의 근거지로 지목되어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된 제천. (제천시청 제공)

구한말 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 맥켄지는 제천에 도착한 당시 심경을 이렇게 서술했다. 그가 본 제천은 이미 ‘지도에서 사라진’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오가던 시가지는 전부 검은 재가 되고 행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일본군의 보복성 탄압이었다. 구한말 의병의 최초 진원지였던 제천의병이 일본군을 진압하면서부터였다.

의병장 유인석 장군 영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의병장 유인석 장군 영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제천의병은 1896년 2월 7일 의암 유인석 장군이 대장 격인 ‘호좌의진’의 자리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이후 의병군은 제천·청풍·단양·영춘 등 사군(四郡) 지역을 휩쓸며 활약, 훗날 독립군의 정신적·군사적 토대가 된다. ‘대한민국 자주독립’이라는 소나무에 제천은 든든한 뿌리 역할을 한 셈이다.

◆화서학파서 출발… 농민 합류

1895년 10월 8일 일본 육군 출신 미우라 고로(三浦梧櫻) 당시 공사일제가 조선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이어 같은해 11월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이 선포됐다. 제천의병이 일어난 것은 그 이듬해였다.

제천의병 정신은 외세로부터 조선의 유학 정신을 지키자는 ‘위정척사론’에서 출발한다. 의암 유인석 장군 등 위정척사론을 주창했던 화서학파는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장담마을에 모여 살았다. 의병이 제천에서 조직된 이유다. 일제 역시 유학자들이 수시로 모여 수학하는 문화를 알고 있었기에 화서학파는 감시를 피해 의병을 모집할 수 있었다.

1907년 제천 의병의 모습. 맥켄지 기자가 촬영했다. (제천시청 제공)
1907년 제천 의병의 모습. 맥켄지 기자가 촬영했다. (제천시청 제공)

의병은 규모가 커져 제천, 충주, 원주 등지에서 커다란 활약을 했다. 당시 의병군만 3000여명을 넘을 정도였다. 특이한 것은 유생과 농민 모두 한마음이 돼 의병으로 모인 점이다. 당시는 동학농민운동의 여파로 계층간 갈등이 극심할 때였다. 이러한 시국 속에 유학자와 농민이 함께 어깨를 맞대고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다.

◆‘이름 없는 이들’ 기리는 백병풍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자양영당 전경. ⓒ천지일보 2023.04.11.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자양영당 전경. ⓒ천지일보 2023.04.11.

제천의병의 발자취를 그대로 간직한 장암마을에는 제천의병전시관과 자양영당이 있다. 자양영당은 의병을 주도한 화서학파가 수학하던 향교, 즉 교육기관이다. 이곳에는 나라를 지켰던 의병을 모시는 위패가 있는데 그중 백병풍도 있다.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백병풍이 드리워진 자양영당 내부 전경. ⓒ천지일보 2023.04.11.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백병풍이 드리워진 자양영당 내부 전경. ⓒ천지일보 2023.04.11.

제천의병전시관에서 만난 정복순 해설사는 백병풍에 대해 “이름 없는 이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해설사는 “농민들이나 상민들은 이름이 없어서 ‘개똥이 엄마’ ‘유서방’ 이렇게 부르지 않았나”며 “제천에서만 1300명이 의병 전투로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1/3이 제천 사람이었다. 저 백병풍에는 이름을 알 수가 없지만 목숨을 잃은 농민들의 이름이 다 기록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천은 1895년부터 1907년까지 13년 동안 꾸준히 의병이 일어난 본고장이다. 마을 전체가 의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의 집요한 추적… 가난 대이어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제천의병전시관 기념탑. ⓒ천지일보 2023.04.11.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제천의병전시관 기념탑. ⓒ천지일보 2023.04.11.

제천의병 전사자 중엔 발톱이 없는 시신이 많았다고 한다. 산간지대였던 제천의 겨울은 특히 매서웠다. 당시 일본의 추적을 피해 산속에서 잠복하던 의병들은 혹독한 추위 속에 동상에 걸렸고 그로 인해 발톱이 빠졌다.

의암 유인석 장군 역시 당시 전투의 승패보다도 의병들을 어떻게 먹이고 얼어 죽지 않게 할지를 더 고민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추격은 집요했다. 일제가 의병에 패하자 수색 작전에 돌입해 집집마다 물건을 빼앗고 불태웠다. “젖먹이 때부터 살던 집을 제발 불태우지 말라”며 애원하는 노인과 일본군을 미처 못 보고 밭을 매던 무고한 농민을 사살했다.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은 의병이나 조선인이 이미 목숨이 끊어진 걸 확인했음에도 그 시신을 알아볼 수 없게 훼손했다고 한다. 후손까지 집요하게 처벌해 세간에는 독립운동, 의병에 동참하면 3대가 못 살았다는 말도 전해진다.

의병들이 잠시 들른 주막을 일본군들이 파괴한 모습. (제천시청 제공)
의병들이 잠시 들른 주막을 일본군들이 파괴한 모습. (제천시청 제공)

한 제천의병 후손은 일제가 꾸준하게 추적해오는 통에 32번 이사했다고 회고했다. 의병의 후손이란 이유 하나로 압제를 하다 보니 가명을 쓰고 아이들 역시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그 여파는 대를 이어 가난을 낳았다.

◆물자난에도 ‘결연한 독립 의지’

이러한 폭압 속에서 의병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당시 기록이 있다. 맥켄지 기자가 제천에서 원주로 올라가 6명의 의병과 맞닥뜨린 때였다. 다음은 이에 대한 기자의 기록이다.

‘한 청년은 전장총으로 알려져 있는 아주 구식의 낡은 한국 사냥총을 자랑스럽게 들고 있었다. (중략) 탄약 재는데 쓰는 탄약꼬질대는 나무로 만든 수공품이었고 총신(銃身)은 녹이 슬어 있었고 멜방은 헝겊조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한 청년은 아버지가 10살 되는 귀여운 아들에게 내줄 수 있을 만큼 위험이 없는 조그마한 사냥총을 가지고 있었다. (중략)이 사람들이 몇 주 동안 일본군에 대항해 온 의병이라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의병군이 사용했던 화승총. ⓒ천지일보 2023.04.11.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의병군이 사용했던 화승총. ⓒ천지일보 2023.04.11.

일본이 당시 고속도로와 다름없던 물길을 통제하고 있었기에 의병군은 물자와 식량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맥켄지 기자에 따르면 곳곳에서 만난 의병 중에는 10대의 앳된 티가 나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대부분 정식 군대 훈련을 받지 못했다. 산악지대였던 제천에는 포수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이들이 총 쏘는 훈련을 도맡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맥 켄지 기자는 그들의 결연한 의지를 엿보고 동정심을 거둔다.

의병투쟁 무명용사와 각종 무기류. (제천시청 제공)
의병투쟁 무명용사와 각종 무기류. (제천시청 제공)

‘결과가 뻔한, 가망이 없는 싸움을 벌여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이들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그러나 나의 오른편에 서 있는 분대장의 빛나는 눈과 얼굴의 미소를 보았을 때 가엽다는 생각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불쌍하다니! 내 생각이 잘못이리라. 적어도 그들은 비록 그 표현하는 방법이 틀렸다 할지라도 동포에게 애국심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망국정책 중단하라” 의암 정신 이어져

제천의병들의 활약을 확일할 수 있는제천의병전시관 내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제천의병들의 활약을 확일할 수 있는제천의병전시관 내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의암 유인석 장군은 53세에 의병장에 추대된 이후 일생을 의병장으로서 활약한다.

호좌 의병진이 제천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문경의 이강년, 영춘의 권호선, 원주의 한동직, 횡성의 이명로 등의 의병장들이 각기 일군과 함께 합류했다.

의병진은 이후 5월 26일 제천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일본군·관군과 활발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격장에 임명된 이강년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고 전해진다.

이후 중앙 관군의 의병해산 권고에도 유인석 장군은 “정부가 망국개화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 특히 일제 침략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의병항전을 계속할 것”이라고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의병진이 제천전투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이후 풍기·영춘·충주·음성·괴산 등 소규모 전투를 전개하던 의병진은 9월 28일 해산한다.

제천의병 219명이 해산했던 만주 서간도 사첨자 (네이버 지식백과 제공)
제천의병 219명이 해산했던 만주 서간도 사첨자 (네이버 지식백과 제공)

유인석 장군이 8월 23일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변 초산에 도착할 때 즈음이었다. 그는 친일 개화파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뒤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懷仁縣)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의 지방관리가 “의병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입국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의병은 해산됐다.

지금도 매년 10월 초 10일간 제천의병제를 개최, 횃불을 봉송한다. 제천 의병제는 제천의병 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던 1995년 첫 막을 올렸다. 어려움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의 고장 제천에서 제천의병제추진위원회 주최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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