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지지세력 모은 신홍식
‘최후의 1인 1각까지 매진’
의식함양을 강조한 권병덕
신석구 “가슴 속에 민족정신을”

청주 출신의 민족대표 3인 ⓒ천지일보 그래픽
청주 출신의 민족대표 3인 ⓒ천지일보 그래픽

편집자 주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피 흘려 희생한 3.1독립만세운동이 올해로 104주년을 맞이했다. 광복 78주년을 맞아 본지는 손병희를 필두로 민족대표 33인 중 6명을 배출한 충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아울러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단재 신채호, 예관 신규식 등 자랑스러운 충북인을 소개하고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그 의미를 되짚고자 한다.

[천지일보 충북=홍나리 기자] “우리는 정의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일본은 당연히 조선을 독립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은 동양의 평화를 역설하고 있으나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려면 조선의 독립이 필요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이었던 동오 신홍식 선생은 수감 당시 “독립이 될 줄 알았냐”는 일제의 질문에 이같이 답한다. 평양에서 3.1운동 지지세력을 모으던 민족대표 신홍식이 서울행 기차에 오른 것은 1919년 2월 28일이었다. 이미 평양에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 준비를 마친 뒤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신홍식은 이 자리에 참석해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자진 체포된다. 건물 안팎으로 많은 군중이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만세삼창을 외치는 소리가 우레처럼 울리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3.1 운동 주도 인물들에게 선고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판결문 (출처: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가 3.1 운동 주도 인물들에게 선고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판결문 (출처: 국가기록원)

1919년 10월 30일 조선총독부는 신홍식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한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제작한 뒤 조선 전체에 배부, 민중에게 평화를 ‘선동’한 죄목이었다.

본지는 민족대표 일원이었던 신홍식과 권병덕 등 청주 출신 민족대표들을 조명하고 그들의 절개를 좇아가봤다.

◆“하늘이 조선 독립시킬 것” 동오 신홍식

신홍식은 1872년 청주시 가덕면에서 출생했다. 서얼 출신이었지만 지역의 유력한 가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한문을 공부해 초동의 나이에 시를 짓고 16세가 됐을 때엔 “사서삼경에 능통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갑오개혁으로 과거가 폐지되고 동학,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이에 신홍식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자신을 ‘사농공상의 실패자’로 자책했다. 그러던 중 32살 되던 해 북감리회 ‘청주읍교회’에 다니기 시작, 종교 생활에 들어선다. 현재 이 교회는 육거리시장 안에 있다. 그의 나이 41세에 감리교 공주읍교회 담임 목사를 맡고 충남 공주 일대에서 활동했다.

동오 신홍식 선생. (출처: 네이버 인물사전)
동오 신홍식 선생. (출처: 네이버 인물사전)

그런 그가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 건 평양으로 활동지를 옮긴 이후다. 다음 경성 지방법원 형사부의 판결문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다.

‘피고 이인환은 그달(2월) 14일경 평안남도 평양부 내에서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 피고 신홍식에게 조선독립운동의 계획을 말하여 찬성을 구했는데 위와 그날 한 사상을 갖고 있던 피고 신홍식은 이에 동의하고 바로 경성으로 나옴에 따라(중략)’

신홍식은 이승훈(판결문 상 피고 이인환)을 통해 서울에서 열릴 3.1운동 소식을 접하고 2월 20일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선다. 평양 지역의 지지세력 확보가 그의 임무였다. 3.1만세 운동 주도자로 체포된 신홍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8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동오 신홍식 선생의 형무소 카드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오 신홍식 선생의 형무소 카드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홍식은 일본의 압제에도 당당히 “하늘이 조선을 독립시켜줄 것”이라며 “조선을 조선사람의 조선으로 회복해야겠다”고 외쳤다. 그러면서 “일제의 참혹한 비인도적 태도와 총독 폭정의 압제와 폭압이 시시각각으로 고통을 주니 조선독립의 사상이 날로 더 가슴에 부글부글 끓게 됐다”고 분개했다.

출옥 후에도 인천·원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그는 1939년 숨을 거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기독교 지도자이자 민족대표였던 신홍식의 면모는 묘소에서도 드러난다.

동오 신홍식 선생의 묘소와 묘비 (출처: 청주시청)
동오 신홍식 선생의 묘소와 묘비 (출처: 청주시청)

가덕면 행정복지센터 맞은편 애산에 그의 묘소가 있다. 묘소 오른쪽에 묘비가 있는데 이 묘비명은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기록됐다. 이어 왼쪽에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세운 기념비가 자리 잡고 있다. 진정 ‘최후의 1인 1각까지 독립의 의사를 발표하고 매진’했던 일생이다.

◆“사랑이 없어 싸우는 것” 청암 권병덕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청주 문의·가덕 일대는 일본경찰의 경계가 특히 삼엄했다고 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신홍식·권병덕 등 4명을 배출한 지역으로 주민이 이들과 공사 간에 연락이 많았기 때문이다.

천도교 간부들(맨앞 왼쪽 세번째 권병덕) (출처: 독립기념관)
천도교 간부들(맨앞 왼쪽 세번째 권병덕) (출처: 독립기념관)

청암 권병덕(1867~1943)은 1919년 2월 21일 민족대표 33인에 합류했다. 손병희가 자택으로 천도교인 권병덕을 불러 “조선 독립선언을 하므로 여기에 가망하라”고 권유하면서부터다. 권병덕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독립선언서를 제작, 배포하고 최종 회의까지 함께했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체포된다.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데에는 모친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1868년 4월 25일 청주시 미원면 출생으로 어머니가 신홍식, 신규식, 신채호 등 유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해낸 고령 신씨의 가문이었다.

권병덕은 3.1운동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문 감옥에서 공덕리에 있는 경성 감옥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자유형 중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던 그물 짜는 징역을 1년 5일간 하며 옥고를 치렀다.

그런 그의 ‘인류애’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신홍식 등과 함께 출옥한 권병덕에게 기자가 소감을 묻자 “조선 동포끼리 서로 싸우고 잡아먹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매 첫째 사랑이란 것이 있어야 하겠다”며 민족 간의 단결을 강조했다고 한다.

당시 만기출옥한 독립선언서 관계자 17인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 1921년 11월 4일자.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당시 만기출옥한 독립선언서 관계자 17인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 1921년 11월 4일자.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후 권병덕 선생이 택한 독립운동은 의식함양이었다. 1930년 중반이 흘러가면서 일제가 민족말살통치를 강화하면서부터다. 우리 말과 글이 금지되자 권병덕은 우리 역사에 대한 책을 편찬해 민족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렇게 나온 저서가 1935년 ‘이조전란사’다. 또 애국지사인 최익현·민영환·전명운·장인환 등의 활약을 담은 ‘조선총사(朝鮮總史)’를 발간했다. 그러나 일제는 ‘일제 침략에 항거한 의열사의 활약을 높이 평가해 독립운동을 부추겼다’고 판단, 출판법의 안녕 금지 조항에 의해 삭제 처분을 내렸다.

권병덕은 1943년 7월 13일 오후 자택에서 사망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권병덕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독립을 심으려 한다” 은재 신석구

은재 신석구 선생. (출처: 한국 향토문화전자대전)
은재 신석구 선생. (출처: 한국 향토문화전자대전)

은재 신석구(1875~1950)는 민족대표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인물이다. 그는 1919년 2월 27일 오후 1시 이승훈의 주도로 모인 모임에서 민족대표에 동참, 그 명단이 32명에서 33명으로 확정됐다. 신석구는 청주시 미원면에서 출생했다.

어릴 적 보수적인 유교 가풍에서 태어났지만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그는 기독교 개종을 택한다. 당시 기독교 구국론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을 잇달아 잃는 아픔을 겪었던 그다. 난세 속에서 가족을 잃은 아픔을 딛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신념을 세웠지만 곧 난관에 봉착했다. 신앙에 보수적이었던 그에게 천도교와 합류해 민족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1919년 2월 20일 오화영 목사로부터 독립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선뜻 수락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27일 새벽 “4천년 전해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않으면 더욱 죄가 아니냐”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이후 3.1운동으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1921년 11월 4일 출옥했다. 출옥 이후에도 그는 일제의 폭압적인 문화 통치에 맞서 신사참배 거부 운동과 일장기 게양 거부 행보 등을 이어갔다.

한편 그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자 주변인들은 “그렇게 한다고 일본이 독립을 허락할 것 같은가. 시기상조다”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자 신석구는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 함이 아니요 독립을 심으러 들어가노라”고 답했다.

은재 신석구 선생의 정치범 카드 (출처: 독립기념관)
은재 신석구 선생의 정치범 카드 (출처: 독립기념관)

훗날 그는 민족대표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은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삼 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하여도 만족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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