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진(晋)나라는 주(周)나라 무왕의 아들을 시조로 하며 작위는 후작이었다. 진은 주나라와 가장 가까이 있는 큰 나라였지만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나라 안에 분쟁이 벌어져 분가하여 혈통을 이어받은 무공(武公)이 진(晋)나라 제후인 민공을 쓰러뜨리고 주 왕실에 뇌물을 바치고 새로운 진(晋)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의 아들 헌공으로부터 다시금 혜공, 희공, 문공의 대를 이어 진나라는 크게 흔들렸다.

진(晋)나라 헌공 원년에 주나라 왕실에 내란이 일어나 혜왕이 왕위를 동생에게 빼앗기고 정나라의 도읍인 역읍으로 망명했다.

헌공은 즉위 5년에 서쪽의 야만족이 이융을 무력으로 정벌하여 이희와 그녀의 동생을 사로잡아 데리고 돌아와서 모두 첩으로 삼고 총애했다. 헌공 8년에 대부 사위가 헌공에게 건의했다.

“옛 진(晋)나라의 공자들은 아직 많이 살아 있습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언젠가는 내란이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사위의 건의에 따라 옛 진나라 공자들은 거의 다 죽임을 당했다.

그 뒤에 헌공은 취 땅에 성을 쌓고 이름을 강이라 고치고 나라의 도읍을 그곳으로 옮겼다.

이듬해 화를 면한 진나라 공자 하나가 괵으로 망명하였다. 괵의 왕은 그것을 구실 삼아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으나 진나라는 그들을 물리쳐 승리했다.

헌공 10년에는 오히려 괵나라를 공격하려고 준비를 하자 사위가 아뢰었다. 괵에서 내란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기회라고 간언하는 바람에 사태는 더 진전하지 않았다.

헌공 12년에 이희가 사내 아이 해제를 낳았다. 헌공은 해제를 태자로 삼으려고 이렇게 말했다.

“곡옥은 종묘가 있는 곳이며 포읍과 굴읍은 본래 국경의 요새이다. 이 세 곳을 꼭 내 아들들이 지키게 하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다.”

이런 명목을 구실 삼아서 이미 정해진 태자 신생은 곡옥으로, 공자 중이는 포읍으로, 이오는 굴읍으로 쫓아냈다.

헌공의 계획대로 도읍인 강에다가 해제를 남겨두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태자인 신생을 자리에서 몰아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신생을 낳은 어머니 제강은 제나라 환공의 딸이다. 제강은 이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또한 같은 배에서 태어난 신생의 누이동생은 훗날 진(秦)나라 목공의 부인이 되었다. 또한 중이의 어머니는 책족인 호씨의 딸이며 그 동생에게서 낳은 자식이 이오였다.

헌공에게는 자식이 8명이나 있었는데 그중에서 신생, 중이, 이오 3명이 특히 빼어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헌공은 이희를 총애했기 때문에 이 세 공자를 멀리한 것이다.

헌공 16년에 공은 군대를 상하 2군으로 편제를 바꾸고 자기는 상군을 거느림과 동시에 하군의 장으로는 태자인 신생을 임명했다.

그리고 조숙과 필만을 각기 자신이 타는 병거의 참어(시종), 마구종(마부), 참종(호위병)으로 임명했다. 헌공은 준비를 마치자 주변에 흩어져 있는 곽, 위, 경 등 세 나라를 차례로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승전하여 귀국한 헌공은 태자를 위하여 곡옥에다 성을 쌓고 조숙과 팔만에게는 각기 경나라와 위나라를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대부로 임명했다.

그것을 본 대부 사위가 태자 신생에게 충고를 했다.

“부왕께서는 왕위를 물러 주실 뜻이 없습니다. 성을 주고 하군의 장군으로 임명한 것은 그것만으로 만족하라는 뜻입니다. 더 이상 군주의 자리는 바랄 수 없습니다. 이때에 빨리 외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위험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우에게 자리를 물려준 오태백의 일과 같은 경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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